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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스트존-칼럼

(94)1998년 태국 나콘사완, 투르크메니스탄전의 추억

1998년 태국 나콘사완, 투르크메니스탄전의 추억

2008년 1월 15일


 

오는 30일 칠레와 평가전과 2월 6일 투르크메니스탄과 2010년 남아공월드컵 아시아 3차예선 1차전 엔트리가 곧 발표된다. ‘허정무호’ 1기는 투르크메니스탄전을 출발점으로 한 월드컵 예선, 길게는 월드컵 본선에서의 선전을 겨냥한다. 허정무호의 월드컵 예선 첫 상대 투르크메니스탄은 한국축구가 98방콕아시안게임 A조 예선 첫 경기에서 만난 것이 유일한 팀이다. 1998년 국가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 사령탑을 겸했던 허정무 감독에게 공식대회 첫 패배라는 뼈아픈 기억을 남긴 9년 전 투르크메니스탄전을 돌아보자.


1998년 투르크메니스탄전은 12월 2일 오후 5시30분(한국시간) 방콕 북서쪽 220Km에 있는 나콘사완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현지시간으로는 오후 3시30분, 섭씨 38도에 육박하는 무더운 날씨였다. 한국은 A조 예선에서 투르크메니스탄 베트남과 한 조에 편성됐다. 각조 상위 2개팀이 16강리그에 진출했다. 16강리그는 4팀씩 4개조로 나눠 치러졌는데 각조 상위 2개팀이 8강 토너먼트에 올랐다.


한국대표팀은 11월 27일 출국해 나콘사완에 캠프를 차렸는데 기자는 매일 방콕의 숙소를 출발해 2시간30분 가량 차를 달려 취재하고 또 같은 코스를 돌아오는 고달픈 일정을 소화했다. 태국 입국과 동시에 남부의 휴양도시 송크라의 북한대표팀(감독 안세욱) 캠프로 사진기자와 함께 날아가 한국언론 중 처음으로 북한팀 소식을 송고하느라 기자는 11월 30일부터 나콘사완으로 오가기 시작했다. 곧 터질 악몽같은 일을 예감했을까. 나콘사완으로 가는 도로 곳곳에 널려 있던, 차에 치인 동물들의 사체를 보고 섬뜩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결론을 말하자면 한국은 투르크메니스탄에 2-3으로 역전패했다. 전반 최용수의 연속골로 2-0으로 앞서다 후반 최윤열의 자책골을 포함해 3골을 내줬다. 후반 25분엔 이병근이 퇴장당했다. 경기 후 허 감독은 “뭔가에 씌운 것 같다. 이런 경기는 처음이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축구 예선이 대회 개막 4일 전에 열려 ‘한국선수단에 첫 승전보를 날릴 것’이라고 분위기를 띄우던 당시 신문들엔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 허 감독의 사진과 함께 ‘한국축구 이럴 수가’ ‘충격’ ‘허탈과 경악’ 등의 문구가 뒤덮였다.

 

경기 후 “전반을 마친 뒤 마음을 풀리는 잘못을 범했다. 상대를 얕보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 고백한 허 감독은 “나는 물론 선수들에게도 좋은 교훈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더위와 갑작스런 체력 저하로 한발짝 떼기도 힘들었던 후반 ‘그냥 서 있던’ 19세 유망주 이동국은 “어린 나이에 얻은 거품같은 인기에 취해 구름에 탄 듯 몽롱한 자세로는 발전이 없다”는 질책을 받았다. “마음이 몸을 지배한다”는 말도 했다. 정신력을 유난히 강조하는 허 감독의 ‘유심론’의 단초가 당시에도 보였던 셈이다. 기술위원회가 제몫을 못하자 허 감독이 다음 경기 상대팀들의 경기장을 직접 찾는 일도 잦아졌다.

 

투르크메니스탄전 패배를 딛고 한국은 4일 A조 예선 2차전에서 베트남을 4-0으로 누르고 16강 조별리그에 진출했고 7일 일본(2-0), 9일 UAE(2-0), 11일 쿠웨이트(1-0)를 연파하고 조 1위로 8강에 올랐다. 12월 14일 홈팀 태국과 8강전은 장소를 방콕으로 옮겨 치러졌다. 격투기나 다름없는 거친 경기와 홈텃세 속에 상대 선수가 2명이나 퇴장당한 상황에게 골든골을 내줘 태국에 1-2 역전패를 당한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그날밤 곧바로 짐을 싸 밤샘 비행기를 타고 15일 오전 8시34분 김포공항에 도착한 선수단은 숙소인 타워호텔로 이동해 해단식을 갖고 소속팀으로 돌아갔다. 당시 김포공항에는 수영, 요트선수단의 개선행사가 열려 축구대표팀의 귀국행렬을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당시의 ‘악몽’을 거론하는 것이 공연히 아픈 기억을 들추거나 주눅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외국인 감독 시절 효율적인 조직체계와 풍부한 예산 속에서 진행되던 기술위원회의 상대전력 분석기법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것처럼 뒷걸음질치고, K리그팀들의 무제한적 지원을 기대할 수 없어 사방에 원군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 9년 전의 기억을 자꾸 떠오르게 한다. 새해 험로에 들어선 허정무호가 쓰라린 ‘추억’을 더듬으며 경계를 삼는 한편 액땜을 했으면 한다.


축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