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무호, 한국축구의 '잃어버린 7년'을 찾아라
2007년 12월 11일
'근성의 승부사' 허정무(52) 전 전남 감독이 지난 7일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돼 98년에 이어 두번째 대권을 움켜쥐었다. 2000년 이후 외국인 감독들의 독무대였던 대표팀 감독 자리가 7년만에 국내파에게 넘어온 순간이었다.
돌이켜 보면 허 감독이 전면에 나설 때는 늘 한국축구의 위기였다. 김호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로 대표팀과 인연을 맺은 1993년 11월30일은 '도하의 기적' 끝에 1994년 미국월드컵 본선 티켓을 따낸 한달여 뒤였고, 국가대표팀 겸 올림픽대표팀 감독을 맡은 1998년은 한국축구가 전무후무한 '월드컵 대회 중 감독 경질'의 폭풍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허 감독이 1998년 대표팀 감독에 처음 선임되는 과정도 올해만큼이나 극적이었다. 8월 14일 서울 타워호텔에서 한국축구 사상 첫 대표팀 감독 경선이 열렸다. 당시 3인의 후보였던 김호곤 연세대 감독(현 대한축구협회 전무), 이차만 부산대우 감독(현 부경고 총감독), 허정무 전남 감독(이상 가나다순) 중 김 감독과 허 감독이 연단에 나서 축구 관계자와 취재진을 상대로 축구철학, 대표선수 선발 및 관리 방안, 훈련 계획 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기술위원들의 결선투표 끝에 허 감독이 대권을 쥐었다(이 감독은 당일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2년 뒤인 2000년 시드니올림픽 본선 조별리그에서 사상 최고인 2승1패의 성적을 거두고도 8강 진출에 실패하고, 11월 아시안컵(레바논)에서 3위에 그친 뒤 허 감독은 퇴진했다. 한 달 뒤인 12월 20일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 2년 전 프랑스에서 한국에 충격적인 패배를 안긴 네덜란드인 거스 히딩크 감독이 임기 시작 11일 전에 열린 한·일전(안정환의 골로 1-1 무승부)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7년에 걸친 외국인 감독 시대의 시작이었다.
긴 구비를 돌아온 허 감독이 외국인에게 넘어간 지휘봉을 돌려 받았다. 허 감독에게 지난 7년이 '잃어버린 세월'만은 아니었다. '클레르퐁텐'을 벤치마킹한 '용인축구센터'를 설립해 꿈나무를 키우겠다고 나설 때는 주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지만, 기술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쳐 조 본프레레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의 수석코치를 맡겠다고 할 때는 거센 '태클'을 당했다. 전남 감독 시절 선수단 관련 예산을 직접 관리하는 '퍼거슨식 실험'에 착수할 때는 걱정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FA컵 2연패 때는 함께 샴페인 세례를 받은 듯한 전율을 느꼈다. 되돌아보니 그 많은 일들이 그의 말대로 "누군가 해야 할 일"을 피하지 못한 "승부사의 숙명"을 묵묵히 홀로 감당해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998년 대표팀 감독 경선에 나서면서 허 감독은 출사표 끝에 "대표팀 전임 감독의 지위가 주어진다면 오늘의 제가 있게 한 한국축구를 위해 온 몸을 사르겠습니다"라고 썼다. 지난 7일 취임 기자회견에서 지난 날을 돌아보며 "그 때는 내가 너무 어렸구나, 부족했구나 하고 생각한다. 2002년 월드컵까지 간다는 마음으로 준비했는데 중도 퇴진했다. 7년 전 한을 꼭 풀고 싶다"고 했던 그는 "축구인생 전체를 걸겠다"며 9년 전과 같은 다짐을 했다.
새 도전에 나선 허 감독이 한국인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그를 통해 한국축구가 또 한번 큰 걸음을 내디뎠다는 평가를 받기를 바란다.
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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