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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스트존-칼럼

(89)유로 2008 공인구 '유로패스'로 본 축구세상

유로 2008 공인구 '유로패스'로 본 축구세상

2007년 12월 4일



1993년 이종남 야구 전문기자(2006년 6월 작고)가 번역한, 미국의 전설적인 야구 기자 레너드 코페트의 '야구란 무엇인가(New Thinking Fan's Guide To Baseball)'를 처음 접했을 때의 감동은 14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야구의 각종 논점을 참신한 시각으로 분석한 이 고전의 내용 중 특히 눈을 번쩍 뜨게 한 것은 야구경기의 성립 근거를 기술적인 측면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볼에 대한 두려움과 이를 피하기 위한 투수와 타자간 심리전으로 규정한 초반부와, 야구가 자랑하는 기록과 통계의 허점과 한계를 지적한 후반부였다.


이 책을 다시 들춰보게 한 것은 3일 아디다스가 공개한 유로 2008 공인구 '유로패스'다. 아디다스는 '새 공 표면의 미세돌기 덕에 컨트롤과 킥의 정확성, 파워 전달력, 회전력이 강화됐다'고 발표했다. 축구의 목표인 골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장갑과 공 표면 사이의 마찰력도 늘어 골키퍼가 공을 더 쉽게 잡아낼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나 새 볼이 골키퍼보다 필드플레이어를 더 배려했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다. 이같은 경향은 아디다스가 국제축구연맹(FIFA)에 공인구를 보급하기 시작한 1970년 멕시코월드컵부터 줄곧 이어져온 흐름이다. 이러다가 축구가 조앤 롤링의 베스트셀러 '해리포터'에 나오는 '퀴디치' 경기처럼 되는 것 아니냐는 공상을 하게 된다.


야구의 통계 얘기를 해보자. 특정 연도에 홈런이 많거나 적은 것을 곧바로 타고투저나 투고타저로 연결시킬 수는 없다. 야구경기의 목표는 타자와 투수 중 한쪽의 일방적인 우위가 아니라 양자간 균형을 통해 관전자의 흥미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운드의 높이, 배트의 반발력, 볼의 강도, 글러브의 크기를 조절한다. 심지어 경기장의 넓이를 바꾸거나 모양을 기형적으로 변형하기도 한다.


신발과 함께 축구의 가장 중요한 장비인 볼을 필드플레이어에 유리한 쪽으로 개량해온 축구와, 투타간 긴장을 중시하는 야구의 근본적인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축구경기의 특성이 전적으로 신발과 볼에 따라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볼을 사이에 둔 공격수와 수비수, 양팀 미드필더간 공방이 사실상 축구의 '모든 것'이 됐다. 경기장 곳곳에서 벌어지는 양 진영의 대치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전형과 전술 등 '다른 요소들'이 끊임없이 진화했고,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축구의 더욱 중요한 요소로 비중을 확대했다. 결국 양팀간 객관적인 전력이 엇비슷하다고 전제하면 축구에서도 균형과 이에 따른 긴장감이 가장 중요한 전제가 된다. 실제로 1930년 첫 월드컵 이후 경기당 평균 골수는 줄어드는 추세이고, 1990년 이탈리아대회 이후에는 평균 2.21~2.71골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 이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


축구의 승패는 확률상 기술과 체력 등 객관적인 전력에 따라 갈린다. 그러나 열세를 만회하려는 사령탑의 전략, 최선을 다해 이기려는 선수의 투지,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협력과 희생정신도 무시할 수 없다. 단순하게 정의하면 축구는 '인간의 신체 중 뇌에서 가장 멀고 가장 부자유스런 발로 공을 차는 운동'이다. 축구 장비의 진화는 인간의 한계를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분투를 끌어낸다. 아디다스의 새 공인구는 축구팬이 경기장에서 무엇을 더 집중해 봐야 하는지, 축구경기 종사자들은 어떤 마인드로 고객을 맞아야 하는지를 새삼 일깨운다.

 

축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