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믹스트존-칼럼

(114)김호의 빨간 넥타이, 박경리의 펜

김호의 빨간 넥타이, 박경리의 펜

2008년 5월 13일



사람에 대해 평가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고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외부로 드러난 공적인 활동을 놓고도 세인의 평가는 엇갈린다. 해당 인물의 가계부터 시작해 전 생애를 샅샅이 살펴도 판단의 기준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김호(64) 대전 감독에 대한 축구계의 평가는 대체로 일치한다. ‘영원한 야인’, 프로 감독 중 최다인 13차례나 우승컵을 따낸 ‘축구 기술자( 지도자)’가 그다.


지난해 7월 기자는 3년 8개월간 공백을 뚫고 대전 지휘봉을 쥔 그를, 평생 외길을 걸어온 ‘한국축구의 주류 중 주류’로 이미 규정했던 적이 있다. 그에 대해 나름대로 알만큼 안다는 자신감이 이같은 ‘만용’을 부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한 주 내내 ‘인간 김호’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를 두고 고심했다. 복잡한 상념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난 7일 밤 며느리와 손자를 교통사고로 잃은 김 감독은 장례절차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청평과 서울, 대전을 오가며 선수단 훈련을 지휘했다. 11일 부산 원정경기에서 그는 애도의 리본 대신 팬에 대한 서비스와 임무에 대한 성실성을 뜻하는 빨간 넥타이를 매고 벤치를 지켰다.


부산전에서 승리해 얻은 K리그 첫 개인 통산 200승의 영광을 고인들의 영전에 바쳤지만 상궤를 넘은 행동을 한 그의 내면이 궁금했다.


의문은 그의 고향 경남 통영에서 풀렸다. 최근 통영은 여러 이야기를 쏟아냈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가 지난 5일 타계해 9일 고향의 대지에 묻혔고, 지난달 ‘깃발’의 시인 유치환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여부가 논란이 됐다. 10일 한 방송사는 충무공 이순신의 인간적 고뇌에 초점을 맞춘 교양물을 내보냈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53세의 충무공은 모함을 받아 투옥됐고, 어머니를 길에서 떠나 보냈으며, 막내 아들을 왜군에 잃었다. 충무공이 난중일기에 남긴 “내일이 막내 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인데 마음껏 울어보지도 못했다”는 고통스런 독백이 김 감독의 최근 언행과 겹쳐졌다.

 

박경리와 유치환 외에도 작곡가 윤이상, 극작가 유치진, 시인 김춘수, 화가 전혁림 등을 배출한 고향에 강한 자부심을 가진 그는 수원 감독 때 선수들을 이끌고, 어린 시절 자신이 소풍을 가는 등 즐겨 찾았던 한산대첩의 무대 제승당을 참배했다. 평소 고향 얘기만 나오면 충무공과, 고향이 배출한 인물들의 얘기를 즐겨 하곤 했으니 김 감독의 마음 속에는 이들의 정신세계와 깊게 상통하는 면이 있었던 셈이다.

 

김 감독의 유년 시절은 어선을 소유했던 선대가 고향에 교회를 세울 만큼 유복했다. 그러나 가업이 기울고 육사 출신 청년장교였던 형이 베트남에서 전사하는 풍파 속에 그의 최종 학력은 ‘동래고 졸업’이 됐다. 당대 최고 수비수의 명성을 안고 은퇴한 그는 동료들이 화려하게 지도자로 출발할 때 지방의 고교에서 어린 선수들에게 열정을 쏟아 붓고 축구철학을 벼리며 절치부심했다. 그리고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대표팀을 이끌고 당시까지 최고 성적을 거뒀다. 그의 입을 통해 한국축구의 과제, 세계축구계의 조류, 각국 지도자와 선수들의 장·단점에 대한 해설과 함께 마오쩌뚱, 호치민, 체게바라 등 혁명가들의 이름을 들을 수 있게 된 사연은 이처럼 깊다.


김 감독의 삶은 ‘작가의 불행은 문학적 성취의 필수조건’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11일 부산전을 앞두고 김 감독은 어쩌면 금강석처럼 굳센 마음으로 갑옷을 챙겨 입던 충무공, 개인의 아픔을 더 가치있는 그 무엇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펜을 들었던 박경리의 심정을 떠올리며 빨간 넥타이를 매지 않았을까.


한 베테랑 축구기자와 20년 넘는 긴 시간 동안 깊은 교분을 유지해온 김 감독에게 몇 해 전 비결을 물은 적이 있다. 대답은 짧았다. “그 사람, 변함이 없잖소.” 험로를 헤쳐온 그의 삶의 역정과 성취는 이미 한국축구사의 큰 산이 됐다. 무정한 일인지 모르지만 김 감독에게 깊은 슬픔을 속에 삭여 영롱한 보석으로 바꾸는 ‘변함없는 사람’로 남아 주기를 청해 본다. 용장과 지장이 넘쳐나는 한국축구도 이제 정신적 거목을 가질 때가 됐고, 당대에 그만큼 그 자리에 적합한 인물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축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