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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스트존-칼럼

(112)'니포축구'의 수제자, 세 남자 이야기

'니포축구'의 수제자, 세 남자 이야기

2008년 4월 29일


 

1990년대 한국축구를 풍미했던 ‘러시아 신사’ 발레리 니폼니시(65) 감독에게 사사했던 조윤환(47) 전 전북 감독과 최윤겸(46) 전 대전 감독, 하재훈(43) 전 부천 감독(현 대한축구협회 기술부장)을 지난 22일 만났다. 부천SK의 운영과장으로 선수단의 살림살이를 도맡다 퇴직한 뒤 미국 애틀랜타로 이민을 간 윤태홍(63) 선생이 신병치료를 위해 오랜만에 귀국해 점심 약속을 잡았다. 기왕이면 당시 멤버들이 함께 보자고 의기투합했다. 행주산성 인근의 닭백숙집으로 걸음했는데 모두가 세 시간이 넘도록 자리를 뜰 생각이 없었다. 니폼니시 감독과 추억, 자신들의 향후 인생계획, 유공을 모체로 하는 제주 유나이티드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대화의 주제였다.


올드팬에게 ‘니포축구’는 기술을 중시하는 자율축구, 미드필더를 중심으로 짧은 패스로 경기장을 썰어가는 아름다운 축구, 이원식 등 조커의 적적한 활용 등으로 뇌리에 남아 있다. 2002년 월드컵을 전후해 거스 히딩크 대표팀 감독이 한국축구의 새 장을 열었지만 당시만 해도 니폼니시 감독 아래서 수석코치(조윤환)-코치(최윤겸)-트레이너(하재훈)로 활동한 이들은 ‘니포축구’의 정수를 온 몸으로 흠뻑 빨아들인 한국축구의 ‘신세대 지도자’였다. 축구 명문대 출신이 아니라는 공통점도 지닌 이들은 니폼니시 감독이 떠난 뒤 차례로 부천SK의 지휘봉을 잡아 니폼니시의 가르침에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입혔다.


임기응변에 능한 조 감독은 수비 조직력을 강화하고 몸싸움을 강조하는 한국식 요소를 더해 프로축구에 새 바람을 몰고 왔고, 최 감독은 대전 시티즌 사령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데이터와 책임감, 근성을 강조하며 대전을 ‘축구특별시’로 불리게 하는 큰 성취를 이뤘다. 축구 지도자 중 컴퓨터를 가장 잘 다룬다는 평가를 받는 하 감독은 수평적 리더십을 보여주며 전력분석, 니포축구의 최대 약점이었던 피지컬 트레이닝 부분의 보완을 통해 팀을 FA컵 결승으로 이끌었다.


오랜 실무경험을 살려 한국프로축구연맹의 각종 규정과 규약 제정에 힘을 보탠 윤태홍 선생은 이들을 프로축구 지도자로 성장시킨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니폼니시 감독에게 자신의 열정과 지식을 전부 이들에게 쏟아 붓도록 요청했고, 스페인 전지훈련 때는 니폼니시 감독이 잠든 한밤중 세비야 등 현지 프리메라리가 감독을 몰래 초청해 과외수업을 받게 했다. 특히 니폼니시 감독이 떠난 뒤에는 외부인사의 극심한 로비와 내부의 반대를 뚫고 조윤환 수석코치를 후임 감독으로 앉혀 ‘니포축구’의 맥을 잇게 했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지휘봉을 놓은 이들은 다음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조 감독은 중국행을 타진하고 있고, 최 감독은 현장 시절의 시행착오를 되짚어 보며 지도자 인생의 전환점을 준비하고 있다. 축구협회 기술부장으로 행정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하 감독도 프로축구 현장에 대한 관심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


둥지를 옮기고 이름도 바뀌었지만 현존 최고(最古)의 프로축구팀인 제주 유나이티드는 매년 OB 초청행사를 벌이는 등 전통을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아쉬움도 있다. 전통을 제대로 찾으려면 이런 정기모임과 함께 실질적인 인적인 네트워크 강화, 구체적으로는 ‘SK축구’가 배출한 지도자들에 대한 좀 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제주축구’의 기본 컬러는 니폼니시 감독과 그 후계자들에 의해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축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