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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 참나무 분투기

[불암산 참나무 분투기](1)산불 잿더미 속에서 움튼 희망, 함께 하실래요?

2015년 4월 6일


<편집자주>지난 3월 13일 오후 10시 57분쯤 서울 노원구 중계동 불암산 중턱에 있는 학도암 부근 344m 지점의 5부 능선에서 불이 나 축구장 3개 크기인 임야 1만 5000㎡가 탔습니다. 불은 소방관과 경찰관, 구청 관계자, 군인 등 총 1600여명과 소방장비 65대가 동원된 끝에 3시간 18분만인 14일 오전 2시 15분께 일단 진화됐습니다. 14일 오후 잔불이 재발화돼 한때 연기가 솟았으나 곧 꺼졌습니다.

스포츠서울은 이번 불로 피해를 입은 참나무를 중심으로 한 주변 식물의 변화과정을 '불암산 참나무 분투기'라는 제목의 글과 사진을 통해 추적합니다. 글은 때로는 관찰자의 시각으로, 때로는 참나무의 관점으로 서술됩니다.

글을 연재하는 동안 노원구에서 활동하는 환경단체인 '지구의 친구들', 주말농장 텃밭을 중심으로 모인 '노원도시농업협의회' 회원을 비롯한 전문가의 도움도 받을 예정입니다.



♥첫번째 이야기-다시 움트는 참나무의 꿈(2015년 4월 6일)


2015년 3월 13일 밤. 참 끔찍했습니다.


마른 낙엽 속에서 봄을 맞을 채비로 뒤숭숭하던 그 날 깊은 밤, 저 '불암산 도토리'는 매캐한 연기에 큰 위험이 닥쳐온 것을 직감했습니다. 산 중턱에서 시작된 불은 오랜 겨울가뭄으로 바싹 마은 낙엽을 쏘시개 삼아 크기를 키우더니 순식간에 저를 향해 피어올랐습니다. 날름거리는 불의 혓바닥에 노출된 저는 속수무책으로 화기(火氣)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불이 일어난 다음날 찾은 불암산 현장. 아이의 발걸음마다 회색 잿더미가 푸석푸석 일어났다. 2015.3.14. 류재규기자



제 삶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쓴웃음을 짓겠지만 돌아보면 제 운명도 참 기구했습니다.

지난해 온갖 해충의 공격을 용케도 피해내며 통통하게 살을 찌웠습니다. 가을을 맞아 희망에 부풀어 새 출발을 다짐하며 엄마의 몸에서 떨어져나와 10여m 아래로 떨어지는 추락의 아찔함을 맛봤습니다. 다람쥐 등 산짐승과 저를 탐하는 사람들의 손길도 피해야 했죠. 오랜 산고를 겪은 엄마가 고통 끝에 떨어뜨려준 갈색 낙엽 속에 몸을 숨긴 채 포근하게 한겨울을 날 수 있었습니다.

산불이 휩쓸고 간 잿더미 속에 모습을 드러낸 도토리. 그나마 형체를 지키고 있는 것과 완전히 타 재가 된 것들이 섞여 있다. 2015.3.14. 류재규기자 



겨울 동안에도 제가 가만히 있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몸 속에서 끊임없는 변화가 일어났지요. 온 옴을 감싸는 뻐근한 기운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껍질을 뚫고 두려움 속에 가만히 발을 내밀었고, 그 발은 향긋한 땅 내음에 끌려 본능적으로 땅으로 땅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모든 생명의 고향인 대지에 저도 마침내 여린 뿌리를 내린 것이지요.

그리고 새 봄을 맞아 또다른 변신의 꿈에 부풀어 있던 그 때 참혹한 산불을 만나는 변을 당했습니다.

수령 수십년은 된 나무 껍질이 숯처럼 푸석푸석해져 버렸다. 껍질 안쪽까지 완전히 타지는 않았는지, 며칠 후 봄비가 온 뒤 나무 위 잔가지에서 움이 터져나왔다.(2015년 3월 14일) 류재규기자



어쨌든 그 날 밤 그 난리통에서 간신히 벗어난 뒤 낙담 속에서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따끔거리는 삭신을 어루만지며 '그래도 산 목숨을 살아야지' 하며 정신을 차리려는 즈음 두런거리는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딱 보기에도 중년을 훌쩍 남긴 사내와 그의 아들로 보이는 10대 어린아이였습니다.

뿌리를 내리다 산불을 만난 도토리. 싹을 틔우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4개의 샘플 중 가장 피해가 심하다. 뿌리도 탔지만 땅에 단단히 고정돼 기적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2015.4.3. 류재규기자



산 아랫자락에서 10년 가까이 텃밭 농사를 짓던 이 사람들은 처음엔 불 구경, 정확히 말하자면 불이 꺼진 산 구경을 하러 온 듯 했습니다. 그러더니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아랫도리가 시커멓게 타서 숯이 돼버린 주변 나무들을 살피더니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대더군요.
이 사람들이 그 때 했던 말은 대략 이랬습니다.
"이 나무들이 산불이라는 재앙을 어떻게 이기고 산을 되살리는지 지켜 보자."
"그런데 이 나무들이 죽으면 어떻게 해?"
"뿌리는 안 상한 것 같아. 나무는 말라버리더라도 뿌리에서 새 싹이 나오지 않을까?"
"나무를 지켜볼 게 아니라 불이 탄 자리에 쌓인 잿더미에 차라리 더덕이나 도라지를 심어 살펴보는 건 어때?"
"그러다 사람들이 캐가면 어떻게 해."
이렇게 쑥덕거리던 이들은 뭔가 궁리를 하더니 다음 주말에 또 와보자고 하면서 산을 내려갔습니다. 이 사람들이 저러다 말겠지 하면서도 은근히 다음 주말이 기대되는 걸 숨길 수 없더군요.

반쯤 탄 채 뿌리를 내리려는 두번째 도토리 샘플. 역시 뿌리는 땅에 단단히 고정돼 있다. 2015.4.3. 류재규기자 



그리고 다음 주말 문제의 그 사람들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새카맣게 타버린 제 주변 도토리들도 찍고 한창 꽃망울을 터뜨리던 진달래를 배경으로 거무칙칙한 잿더미도 찍었고요. 밑둥이 타버린 참나무에서 어느 방향으로 새 싹이 날지 모른다며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고요. 자기들끼리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으며 눈치를 보아하니 직장 동료한테 이쪽 이야기를 전하고 뭘 써보겠다는 계획을 밝힌 것 같기도 하고, 산 아래 텃밭 사장님하고 상의를 한 것도 같더군요. 어쨌든 이 사람들은 그 날도 어둑해지는 산길을 따라 그렇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비교적 온전한 모습의 세번째 샘플 도토리. 역시 뿌리를 내렸다. 2015.4.3. 류재규기자 



세번째 주말에는 아이 없이 중년 사내 혼자 산을 올라왔습니다. 불길이 미치지 않은 참나무 중간 부근의 작은 가지에서 움이 트는 걸 보더니 갑자기 땅에 있는 저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바로 이거다 하는 표정으로 화상을 심하게 입은 저를 비롯해 비교적 생생한 겉모습을 지닌 채 땅 속으로 발을 뻗기 시작한 동료 도토리 서너개를 골라 집중적으로 사진을 찍어대는 겁니다. 저한테만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아니어서 섭섭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혹시 제가 싹을 내지 못할 경우 이 사람도 관심을 이어갈 대상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장 성한 형태를 간직한 네번재 샘플 도토리. 2015.4.3. 류재규기자 



솔직히 저는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울 수 있을지, 그래서 엄마처럼 큰 나무로 자랄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도 합니다. 산불로 맨땅이 훤히 드러난 상황이라 큰 비라도 오면 무방비 상태로 산사태에 묻히거나 쓸려가버릴지도 모르겠고요. 그렇지만 이 사람들이 하는 양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그래, 어쨌든 죽을 힘을 내서라도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는 혼자 용을 썼지만 이제는 저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으니 마음이 든든해지기도 하고요. '정신을 한 곳으로 모으면 못할 일이 어디 있을까' 하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게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은 의욕도 불끈 생깁니다.

잿더미 속에서 싹을 드러낸 초목. 묵은 나무줄기는 모두 탔지만 놀랍게도 초록색 싹이 나왔다. 2015.4.3. 류재규기자



올해 가을까지 저를 꼭 지켜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세상살이도 고달프다지요? 세상사에 지친 분들이 저를 보고 힘을 낸다면 저 역시 작은 보람으로 삼겠습니다.

연분홍 진달래꽃 너머로 보이는 산불 현장. 화사한 꽃잎과 봄비에 젖은 검은 잿더미가 대조를 이룬다. 2015.4.3. 류재규기자



PS : 제 이름을 아직 밝히지 않았군요.
도토리는 참나무과 나무에 달리는 열매를 통칭하는 말이고요. 참나무에도 여러 종류가 있답니다.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등 대략 여섯가지로 나뉜다고 합니다.
저를 찍은 사람들이 갖고온 책을 뒤져보더니 "아무래도 굴참나무나 상수리나무 열매 같은데 확실한 건 싹이 나봐야 알겠다"고 하더군요. 저도 온 힘을 다해 싹을 낸 뒤 제 이름이 정확하게 뭔지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제 이름을 아는 분은 먼저 알려주셔도 좋고요.

류재규기자 jklyu@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