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야구 기록의 대부 박기철 스포츠투아이 부사장 별세
2016년 4월 6일
놀랍고 슬픕니다.
박기철 부사장은, 독일월드컵이 열린 10년 전 유명을 달리한 야구 전문기자 이종남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김창웅 전 주간야구 대표와 함께 야구와 스포츠의 가치를 깊이 이해하고 키운 진정한 야구인이었습니다.
고인은 생전 이 전 국장과 둘도 없는 지음(知音)이었는데 향년도 비슷합니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지만 하늘은 왜 좋은 사람들을 빨려 데려가는지 야속합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사족>
고인이 졸업한 학과명은 '원자핵공학과'가 맞습니다. 스포츠경향이 제대로 썼습니다. 다른 매체는 대부분 '원자력공학과'라고 썼는데 아마 부실한 보도자료를 받아쓴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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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야구에 인생 바친 야구 기록의 대부 박기철 스포츠투아이 부사장 별세(스포츠경향)
기사입력 2016.04.06 오후 03:03 최종수정 2016.04.06 오후 03:58
박기철 스포츠투아이 부사장이 6일 오전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향년 58세.
고인은 한국 야구 기록 및 통계의 대부로 통한다. 서울대 원자핵공학과(76학번)를 졸업한 뒤 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 KBO(옛 한국야구위원회)의 공식기록원 1세대로 입사했다. 프로야구 출범 산파 역할을 했던 이용일 당시 사무총장이 “원자핵공학과를 나왔으니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 여기 있으면 안된다”고 끝까지 만류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주변에서 ‘미친 놈’ 소리를 들었지만 기꺼이 ‘미친 놈’의 길을 택했다.
공대 출신으로 한국 야구 통계 발전을 이끌었다. 고인의 의견에 따라 KBO는 1982년부터 출루율을 공식 기록으로 삼아 개인상을 시상했다. 메이저리그는 1년 뒤인 1983년부터 출루율을 공식기록으로 삼았다. 1983년 말부터 야구 통계 전산화를 주도했다. 지나치게 비용이 많이 든다는 KBO 이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컴퓨터 도입을 주장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1985년 KBO에 처음 설치된 야구 통계 처리를 위한 컴퓨터는 ‘Perkin-Elmer 3205 슈퍼미니’로 용량은 CPU 1메가바이트에 보조 기억 장치인 카트리지 용량 20메가바이트였다. 그 때 돈으로 가격이 4000만원이었다.
1994년까지 기록원으로 프로야구 현장을 누볐다. 일본식 기록 방식을 한국 실정에 맞게 개정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1995년 KBO 기획실장이 됐고 1998년 프로야구 외국인 선수 도입을 추진하고 이끌었다. 기획실장으로 통합 마케팅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구단의 반발로 기획실장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이를 통해 KBOP가 탄생할 수 있었다. 1999년 한국야구정보시스템 이사를 지냈고, 이듬해 한국 최초의 스포츠 통계회사인 스포츠투아이 창설을 주도했다. 1980년대 초반 한국에서는 생소했던 OPS, RC 등의 세이버메트릭스기록을 소개해 ‘한국의 빌 제임스’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상일 KBO 전 사무총장은 “한국 야구 통계가 일본 프로야구 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받도록 수준을 끌어올린 것은 전적으로 박기철 부사장의 작품”이라며 “야구라는 종목 자체가 과학적이다. 공대 출신인 고인과 맞아 떨어진 것 같다. 오직 야구 외에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던 분이다. 야구계의 천재이자 기인”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지난해 한국방송통신대 정보통계학과에 입학할 정도로 야구와 통계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박기철 부사장의 권유로 1990년대 초반 KBO 수습기록원으로 뽑히기도 했던 이태일 NC 다이노스 대표는 “1990년대 초반, 미국에서 스코어북이라는 기록 프로그램을 플로피디스크에 담아 가져다 드렸을 때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며 “비경기인 출신으로 프로야구 발전을 위해 어느 경기인 못지 않게 큰 역할을 하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빈소는 서울 한양대병원 장례식장 11호실. 발인은 8일 오전 8시30분이다. (02)2290-9462.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고인은 한국 야구 기록 및 통계의 대부로 통한다. 서울대 원자핵공학과(76학번)를 졸업한 뒤 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 KBO(옛 한국야구위원회)의 공식기록원 1세대로 입사했다. 프로야구 출범 산파 역할을 했던 이용일 당시 사무총장이 “원자핵공학과를 나왔으니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 여기 있으면 안된다”고 끝까지 만류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주변에서 ‘미친 놈’ 소리를 들었지만 기꺼이 ‘미친 놈’의 길을 택했다.
공대 출신으로 한국 야구 통계 발전을 이끌었다. 고인의 의견에 따라 KBO는 1982년부터 출루율을 공식 기록으로 삼아 개인상을 시상했다. 메이저리그는 1년 뒤인 1983년부터 출루율을 공식기록으로 삼았다. 1983년 말부터 야구 통계 전산화를 주도했다. 지나치게 비용이 많이 든다는 KBO 이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컴퓨터 도입을 주장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1985년 KBO에 처음 설치된 야구 통계 처리를 위한 컴퓨터는 ‘Perkin-Elmer 3205 슈퍼미니’로 용량은 CPU 1메가바이트에 보조 기억 장치인 카트리지 용량 20메가바이트였다. 그 때 돈으로 가격이 4000만원이었다.
1994년까지 기록원으로 프로야구 현장을 누볐다. 일본식 기록 방식을 한국 실정에 맞게 개정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1995년 KBO 기획실장이 됐고 1998년 프로야구 외국인 선수 도입을 추진하고 이끌었다. 기획실장으로 통합 마케팅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구단의 반발로 기획실장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이를 통해 KBOP가 탄생할 수 있었다. 1999년 한국야구정보시스템 이사를 지냈고, 이듬해 한국 최초의 스포츠 통계회사인 스포츠투아이 창설을 주도했다. 1980년대 초반 한국에서는 생소했던 OPS, RC 등의 세이버메트릭스기록을 소개해 ‘한국의 빌 제임스’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상일 KBO 전 사무총장은 “한국 야구 통계가 일본 프로야구 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받도록 수준을 끌어올린 것은 전적으로 박기철 부사장의 작품”이라며 “야구라는 종목 자체가 과학적이다. 공대 출신인 고인과 맞아 떨어진 것 같다. 오직 야구 외에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던 분이다. 야구계의 천재이자 기인”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지난해 한국방송통신대 정보통계학과에 입학할 정도로 야구와 통계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박기철 부사장의 권유로 1990년대 초반 KBO 수습기록원으로 뽑히기도 했던 이태일 NC 다이노스 대표는 “1990년대 초반, 미국에서 스코어북이라는 기록 프로그램을 플로피디스크에 담아 가져다 드렸을 때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며 “비경기인 출신으로 프로야구 발전을 위해 어느 경기인 못지 않게 큰 역할을 하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빈소는 서울 한양대병원 장례식장 11호실. 발인은 8일 오전 8시30분이다. (02)2290-9462.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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