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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독일월드컵

[아메리카 메신저](13)축구인의 말, 정치인의 말

축구인의 말, 정치인의 말

2006년 2월 21일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이 지난해 낸 실질적인 기부금이 대한축구협회의 활동비보다 적었다는 사실이 지난 20일 밝혀진 뒤 축구협회 관계자는 “문제가 된 홍보비와 업무 추진비, 활동비는 정 회장과 직접 관련이 없으며 정 회장이 실제로 사용한 돈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해명했다. “기부금 액수가 적은 것은 (재력이 넉넉하지 않는) 축구인 출신이 회장을 맡아도 될 정도로 축구협회의 재정 자립도가 탄탄해졌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지만 엉뚱한 논리로 사태의 본질을 가리려는 것 아니냐는 시선이 뒤따랐다.

 

2006년 2월 9일 헐리드우 스티븐 스필버그 손도장.

 


  아드보카트호와 미국대표팀간의 비공개 연습경기가 벌어진 지난 5일. 국내 미디어와 현지 동포 언론을 포함한 30여명의 취재진은 미국 측의 비공개 요구에 밀려 LA 남부 카슨의 홈디포센터 앞에서 대기하는 고통을 겪었다. 경기 뒤 대한축구협회 측이 배포한 사진을 통해 경기장에서 아드보카트 감독과 환하게 웃음짓는 정 회장을 보면서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이기도 한 정 회장이 이럴 때 축구외교력을 발휘해주면 좋았을 것이라며 아쉬운 생각을 하고 있던 취재진은 이튿날 정 회장이 워싱턴에서 국내 특파원들을 만나 정치 얘기를 하면서 ‘히딩크 감독이 잉글랜드 감독을 맡을 것으로 안다’ ‘목욕탕에서 본 아드보카트 감독의 몸이 완전히 통이더라’는 등의 축구 관련 얘기를 쏟아냈다는 소식을 접하고 역시 정 회장은 축구인 이전에 정치인이었구나 하는 당연한 현실을 재확인했다.


  만약 정 회장이 축구 담당 기자들을 만나 축구 얘기를 하면서 한때 같은 길을 걷던 거물 정치인의 확인되지 않은 향후 거취나, 특정 정치인의 벗은 몸매를 곁다리 화제로 집어 넣었다면 어땠을까. 평소 정 회장의 언행이나 인품으로 봐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아마 적절하지 않은 일이라는 비판에 직면했을 것이다. 최근 축구협회 기술국장이 한 언론매체와 박주영을 비판한 인터뷰를 한 뒤 국가대표팀 코치가 ‘자제’를 요청하는 일이 있었다. 애정을 담은 표현이 과장됐다고 해명했지만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처럼 말은 하는 사람의 위치나 듣는 사람의 처지, 그 말이 행해지는 시기와 장소에 따라 크게 다른 뉘앙스와 울림을 갖는다. 말의 홍수 속에서 진짜말과 가짜말을 가려 들어야 하는 청중은 고달프다. 말 자체가 힘을 솟게 하고, 강한 설득력을 갖는 탁견이나 적절한 비유에 무릎을 치며 웃음짓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그런 말을 들을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