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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 사람-인터뷰

빙상 레전드 이규혁 "내가 안현수였다면... 귀화까지는 안했다"

빙상 레전드 이규혁 "내가 안현수였다면... 귀화까지는 안했다"

2014년 4월 21일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태극마크를 단 뒤 22년간 6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노메달,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꿈을 향해 지치지 않는 도전을 펼친 영웅. 지난 7일 30여년의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은퇴한 이규혁(36)에게 팬이 붙여준 수식어다.

‘시간을 거스른 사나이’ 이규혁이 시계를 배경으로 잘 달려온 스스로에게 박수를 치고 있다.  최재원기자  shine@sportsseoul.com


지난 2월 열린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2연패를 달성한 이상화, 은메달로 선수생활을 마무리한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 2개의 금메달을 딴 여자쇼트트랙대표팀, 색다른 재미를 안겨준 여자컬링대표팀이 국민의 시선을 잡았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이규혁의 이름도 팬의 머리에 뚜렷이 새겨졌다.

이규혁은 ‘빙상집안’의 맏아들이다. 아버지(이익환·68)는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였고, 어머니(이인숙 전국스케이팅연합회장·58)는 피겨스케이팅 대표팀 코치를 지냈다. 동생 이규현(34)도 피겨스케이팅 선수로 두차례 올림픽에 나섰다.
한국빙상계에서 이규혁의 위치는 특별하다. 이규혁은 국제무대에 본격 등장한 1,2세대인 이영하와 배기태의 뒤를 이은 빙상 3세대에 속한다. 3세대로 함께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제갈성렬과 김윤만이 비교적 일찍 선수생활을 마감한 것과 달리 이규혁이 오래 스케이트를 탄 것은 빙상계에도 복이었다. 이규혁을 통해 한국빙상계는 3차례의 세계신기록, 4차례의 세계스프린터선수권대회 우승을 포함해 각종 국내·외 대회를 치르며 그가 익힌 값진 기술과 선수생활의 노하우까지 물려받았다.
지난 14일 서울 신천의 한 카페에서 이규혁을 만나 오랜 국가대표 선수 생활에 얽힌 사연과 향후 인생 계획을 들어봤다. 절친한 가수 싸이가 ‘유쾌함’을 뜻하는 ‘유’자를 넣어 ‘외유내강’이라고 말한 그대로 그는 밝고 유쾌한 표정이었다. 은퇴에 맞춰 펴낸 책 ‘나는 아직도 금메달을 꿈꾼다’(토트·㈜북새통)를 미리 구해 읽었기에 더 나눌 이야기가 있을까 걱정을 했지만 기우였다. 속마음을 거침없이 털어놓는 그는 달변가이자 말의 화수분이었다.


이규혁은 내내 유쾌했다. 달변가이면서도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애를 썼다.            최재원기자 shine@sportsseoul.com


-지난 7일 은퇴 기자회견에서도 그랬고, 최근 펴낸 책에서도 울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원래 눈물이 많은가.

어릴 때는 안 그랬는데 나이가 들면서 요즘 자주 그런다. 운동선수들은 감수성이 예민하다. 경기 전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다 보면 상상력이 커진다. 태릉선수촌에서 드라마를 보면서 단체로 감정이입을 하는 경우도 많다.

-지겹도록 들었겠지만 다시 묻는다. 메달을 못 따면서도 어떻게 6차례나 올림픽에 출전하게 됐나.
한마디로 선수생활을 더 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잡힐 듯 하면서도 손에 안 들어오는 올림픽 메달에 대한 갈망도 컸다. 그러나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은퇴 뒤 인생에 대한 설계가 없었다. 다음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어릴 때는 올림픽 금메달을 따면 바로 은퇴하겠다고 호언하며 센 척도 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선수생활을 이어가기 위한 핑곗거리가 필요했고, 그것이 올림픽 출전이었다.
내 인생의 첫 기억이 빙상선수다. 어머니가 나를 임신한 채 피겨스케이트 선수를 지도하다가 빙판에서 넘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엄마 뱃속에서 스케이트를 탄 셈이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가족이 정해져 있고, 내가 사람이고 남자인 것처럼 빙상선수는 내 인생의 베이스였다. ‘내가 이걸 왜 하지’ 하는 복잡한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오래 했다. 선수 생활 동안 한번이라도 다른 길을 생각했었다면 더 빨리 은퇴했을지도 모르겠다.

-각종 대회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고 금메달을 따면서도 올림픽 무대에만 서면 작아졌던 이유는.
올림픽에 대한 중압감, 금메달에 대한 지나친 열망, 유독 올림픽에만 가치를 두는 팬의 풍토가 부담스러웠다. 특히 16살 나이로 출전한 첫 올림픽이었던 1994년 릴리함메르 대회 때의 트라우마가 내내 발목을 잡았다. 변성기도 안 지난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힘들었다. 1998년 나가노 대회의 실패 뒤에는 올림픽에만 가면 몸이 굳었다.
선수는 한 번 잘하면 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 본능적으로 몸에 새긴다. 매년 열리는 전국체전이라면 쉽게 극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에서 그런 기회를 잡기는 너무 어려웠다.

-이제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났나.
이번 소치 대회에서야 짐을 벗었다. 과정이 중요하고, 경기를 즐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로 준비한 걸 모두 했다. 좀 더 일찍 알았다면 4년 전 밴쿠버 대회, 8년 전 토리노 대회 때 메달을 따지 않았을까. 소치에서 만난 한 캐나다 선수가 “올림픽에 대한 한국인들의 성원이 그 정도인 줄 몰랐다. 그런 부담을 안고 있었으니 못한 건 당연하다”고 하더라.


이규혁이 지나온 스케이팅 인생을 돌아보고 있다. 후배의 앞길을 막았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 그는 “말도 안 된다”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최재원기자 shine@sportsseoul.com


-‘스피드스케이팅에는 이규혁이 있어 후배가 도전하지 않았다, 이규혁이 후배의 앞길을 막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말도 안 된다. 스피드스케이팅은 기록경기다. 경험이 많다고 선발전에서 득볼 게 없다. 나도 제갈성렬, 김윤만 등 쟁쟁한 선배를 이기고 올림픽 출전권을 땄다. 후배들이 나를 못 뛰어넘으면 국제대회에서 메달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래도 내가 후배에게 양보해야 했다는 가정도 터무니없다. 선수층이 두껍고, 나와 후배의 기록이 비슷하다면 나를 질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번 선발전에서 뽑힌 대표선수 4명 중 내 기록이 2위였다. 내 아래 선수와는 1~2초라는 어마어마한 기록 차이가 났다. 내가 그만뒀으면 후배가 메달을 땄을까?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을 하고, 세계신기록을 세운 사람이 양보했다면 다른 사람이 네덜란드를 이길 수 있었을까?

-스피드스케이팅은 하계종목인 육상이나 사이클과 닮은 점이 많다. 선수는 물론 관중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기록에서 느끼는 짜릿함, 다른 선수와 경쟁에서 승리하면서 얻는 희열, 경기 자체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큰 묘미라고 한다. 선수로 뛰는 동안 세가지 중 어떤 면에 가장 큰 가치를 뒀나.
셋 중 하나만 고르기는 어렵다. 모두가 중요하고 서로 연결돼 있다. 기록은 선수가 가장 욕심내는 것이다. 그러나 일생을 통틀어 최고 전성기에 찾아오는 한두번의 기회를 잡기는 힘들다. 금메달도 마찬가지다. 평소 기록이 좋았다고 큰 대회에서 무조건 우승할 수는 없다. 시차 조절, 적절한 훈련, 당일 경기장 환경, 관중의 반응 등 수많은 변수가 있다. 경기 자체를 즐기는 건 말은 쉬워도 가장 어려운 일이다. 나도 이번 소치 올림픽에서야 처음으로 실제로 경기를 즐겼다.

-부모와 동생 등 전 가족이 ‘빙상 패밀리’다. 장단점이 있었을 텐데.
가족 덕을 봤다는 이야기인가. 전문가끼리는 많은 이야기가 필요없다. 부모님은 내게 “잘 쉬어라”는 말만 했다.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하게 아셨다. 내가 주관적인 평가에 따라 대표로 뽑히는 종목 선수였다면 부모님의 도움을 받았다고 오해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스피드스케이팅은 기록경기다. 오히려 부모님이 나 때문에 속이 상하거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적이 많았다. 빙상계 대선배지만 아들 때문에 말도 잘 못하고 까마득한 후배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게 참 죄송했다.


이규혁은 한국 동계 스포츠, 특히 스피드스케이팅의 앞날을 낙관했다. 테크닉과 끈기라는 장점을 극대화하면 세계무대에서 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재원기자 shine@sportsseoul.com


-소치에서 네덜란드가 대부분 종목을 휩쓸었다. 특히 스피드스케이팅은 체격조건 등에서 동양인에 맞는 종목인가.
한국 선수들의 경쟁력은 충분하다. 최근 우리가 좋은 성적을 내면서 외국 선수들이 “한국 선수들은 체격이 좋은 것도 아니고, 장비도 특별할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갑자기 강해졌느냐”고 묻는다.
스피드스케이팅은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 같다. 그러나 미끄럽지만 마찰력이 있는 얼음판에서 스케이트라는 장비를 몸에 연결해 치르는 종목이다. 이 ‘연결’이 바로 동양인이 파고들 공간이다. 섬세함과 테크닉과 끈기를 갖고 덤비면 유럽인의 파워를 넘을 수 있다. 특히 우리에게는 경쟁 속에서도 뭉쳐서 격려하고 기술과 경험을 나누는 전통이 있다. 코너링 등 쇼트트랙 기술을 접목한 것도 주효했다.
동양인은 단거리에는 승산이 있지만 장거리에는 무리라는 분석도 있었지만 밴쿠버 올림픽에서 이승훈이 1만m 우승을 차지하면서 설득력을 잃었다. 그러나 좁은 저변은 약점이다. 이상화 모태범 이승훈이 메달을 땄지만, 아직은 갑자기 대형선수가 툭 튀어나오고 또다른 선수가 나와 바통을 이어받는 수준이다.

-같은 팀(서울시청)과 매니지먼트사(브리온 컴퍼니) 소속인 이상화에게 각별하게 정성을 쏟았다. 이상화의 스케이팅을 보면서 ‘아, 이건 내 거다’ 하는 게 있다면?
특별히 하나를 집어내 말하기 어렵다.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기술 뿐만 아니라 마인드 컨트롤, 컨디션 관리, 일상 생활까지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상화에게 전했다. 상화는 내 10년 전과 오늘까지 과정을 다 봤고 가장 정확하게 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남자와 달리 상화는 여자다. 해서는 안 되는 일도 많았다. 그래서 일부러 혼도 더 냈다. 상화는 가족처럼 각별하게 신경을 쓰는 후배다.
그러나 이젠 이런 말도 안 맞다. 전에는 내가 상화에게 가르친 것이 보였지만 지금은 상화가 나보다 스케이트를 더 잘 탄다. 큰 업적을 이룬 후배에게 누가 될까 조심스럽다. 상화는 올림픽 2회 연속 금메달리스트고 나는 메달이 없다(웃음).


이상화 이야기가 나오자 이규혁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안현수에 대해서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만약 내가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귀화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재원기자 shine@sportsseoul.com


-안현수(빅토르 안)가 러시아로 귀화했다. 만약 이규혁이 안현수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런 선택을 했을까.

처음엔 나를 포함한 다른 종목의 선수들도 금메달을 3개나 딴 선수가 차라리 은퇴을 하지 어떻게 국적을 바꾸냐고 생각했다. 소치에서도 ‘현수는 이미 러시아 사람인데 응원을 왜 하냐’고 하는 선수도 있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현수 입장도 이해가 된다. 현수는 ‘내가 충분히 메달을 딸 수 있는데 누가 못하게 해 화가 난다. 다른 선택을 해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현수는 그걸 보여줬다.
우리 현실에서는 아무리 기량이 뛰어나도 나이먹은 선수가 계속 운동하기는 어렵다. 은근히 은퇴를 요구하는 주변의 분위기를 나도 여러차례 느꼈다. 운동을 계속 하고 말고는 내 선택이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자꾸 종용할 때 선수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수용하거나 반발해 이기거나 둘 중 하나다. 나도 하나를 고르라면 현수처럼 이기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국적을 바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종목의 성격이 다르다. 기록경기인 내 종목은 문제가 생기면 한국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기록이 처져 선발전에서 떨어지면 그게 곧 실력이다. 더이상 이야기할 게 없다. 선발방식이 다른 현수와 달리 내 종목은 선발전 탈락으로 상황이 종료된다.

-은퇴 기자회견에서 대표팀 코칭스태프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놨다. 진짜 생각이 있나.
지금은 하고 싶지 않다. 선수 때와 생활패턴이 같고 또 경쟁세계에서 살아야 하니까. 그런 세계에서 좀 벗어나고 싶다. 당장 석사학위 논문을 써야 하고, 박사과정을 밟으며 이론적 체계도 쌓고 싶다. 그러나 내 경험을 전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라도 언젠가 1~2년은 해야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장기적으로는 스포츠 외교에 관심이 있다. 국내에서는 많은 분이 각자의 의견을 내고 서로 싸우기도 하지만 나라를 위해 우리 의견을 세계에 알리는 사람은 적다. 선수 출신이 국제 행정과 외교무대에서 잘할 게 있다고 본다.


손가락으로 ‘6’자를 그려보인 이규혁은 은퇴 후 인생도 OK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국가대표팀 감독의 꿈에 대한 속마음도 숨기지 않았다.                                                                                                                                                    최재원기자shine@sportsseoul.com


-현재 대표팀 훈련과 운영방식이 ‘올드하다’고 책에 썼다. 대표팀에서 꼭 고쳐야할 세가지를 꼽는다면.
첫째, 대표 선발과 훈련, 운영의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 코칭스태프가 외부 지시를 받아서는 선수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둘째, 선수 훈련과 관리를 과학화해야 한다. 셋째, 선수단의 팀 스피리트를 확보해 경험을 공유하고 격려하는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 일부 메달리스트는 물론 빙상계 어른들도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여기며 따로 노는 경향이 있다.

-빙상연맹을 비롯한 체육계 개혁 바람이 거세다. 긴 시간 국가대표를 지낸 선수로서 체육개혁을 보는 시각은.
몇몇 사람의 문제로 빙상계 전체 이미지가 흐려져 슬프다. 누가 때렸다느니, 성추행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안타깝다. 선수는 열심히 운동만 했는데. 체육계가 깨끗해져 팬의 사랑을 되찾아야 한다. 이전 분이나, 지금 분이나, 앞으로 할 분이나 누구라도 실수는 할 수 있다. 세상에 완전히 새롭고 완벽한 것이 있겠나. 그러나 최소한 팬에게 실명이 거론되는 사람의 이름 정도는 바꿔야 하지 않을까.

류재규 부국장 jklyu@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