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영, 주영 오빠, 주영 씨
2006년 3월 14일
중학교 2학년 딸아이가 박주영(21·FC서울)을 부르는 호칭이 달라진 것을 최근 깨달았다. 축구 담당 기자 생활 10년이 돼 가지만 평소 집안에서 축구를 화제에 올린 적이 별로 없었는데 딸아이가 유독 박주영에 대해선 아는 체를 하면서 “좋아한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박주영 팬인가 보다 하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호칭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지난 2004년 박주영이 청소년대회에서 급부상할 때 딸아이는 그냥 “박주영”이라고 불렀다. 그 호칭이 1년 남짓만에 “주영씨”로 달라졌다.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 딸아이도 마찬가지였다.
큰 딸아이에게 물어봤다. “축구선수 뿐 아니라 연예인은도 그렇게 부르니. 학교나 학원 친구들은 어떻게 부르니”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친구들도 대부분 ‘주영씨’라고 부르고요. 연예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였다. “왜 그렇게 부르느냐”는 물음엔 더 친근감이 느껴진다는 답이 돌아왔다. 오빠라는 호칭에 대해선 “그렇게 부르는 애들도 아직 있긴 하죠. 그러나 저는 ‘빠순이’는 싫어요. 촌스럽잖아요”라고 대답했다. 아이들을 상대로 꼬치꼬치 ‘취재’하는 ‘기자’를 보고 아내는 그걸 이제 알았느냐는 표정으로 ‘주영씨’라는 호칭에는 연인에 대한 애틋한 느낌이 있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몇년 전까지도 스포츠 스타를 “오빠”라고 부르며 열광하는 여성팬을 경기장에서 만나는 일은 흔했다. 그런 오빠부대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딸아이처럼 ‘오빠부대 단계’를 거치지 않고 호·불호의 감정이입이 없는 호칭 ‘박주영’에서 곧바로 ‘주영씨’로 넘어간다. 새 호칭 속에는 스타에 대한 환상에 들뜬 맹목적인 추종에서 벗어나 일정한 거리를 확보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상대의 참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자신의 정체성도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포함돼 있는 것 같다. ‘빠순이’가 싫다는 말을 들어 보라.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조선시대 한 문인의 말을 원용해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썼다. 호칭의 변화는 결국 축구스타가 국민적인 사랑의 대상이 됐고, 더 깊이 잘 알게 됐다는 사실의 반영이다. 동시에 대중문화를 일방적으로 제공받아 소비하는데 그치지 않고 나름의 논리와 시각으로 비판, 분석하고 감수성이 끌리지 않는 것은 좋아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주체성의 표현으로 읽힌다. 이런 ‘마니아’가 늘어나는 것은 축구를 위해서나 축구의 소비자인 팬 자신을 위해서나 좋은 일이다. 논리의 비약인지 모르겠지만 ‘주영씨’라는 호칭 속에서 진화하는 축구문화의 단면을 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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