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장에 물 아닌 자성과 격려를 채우자
2008년 9월 11일
7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을 노리는 한국축구가 10일 2010년 남아공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첫 경기에서 북한을 상대로 졸전을 벌인 끝에 간신히 1-1로 비겼다. 올림픽대표팀이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조별리그 문턱도 못 넘고 귀국한 뒤 축구팬은 수영 박태환의 선전을 빗대 “축구장에 물 채워라”는 비난을 퍼부으며 분발을 촉구했다. 국가대표팀만이라도 시원스런 경기를 통해 ‘무너진 짝사랑탑’을 우뚝 세워주기를 바라는 역설적인 애정,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팬에게 한국축구는 또한번 차가운 배신으로 답했다.
핵심 공격수의 예상치 못한 부상, 북한의 텃세 등 악조건 속에서 거둔 원정경기 무승부라는 결과 자체에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51위의 한국이 사흘 전 중동 원정경기를 치른 FIFA 랭킹 116위의 북한을 상대로 보여준 경기 내용은 팬의 상처에 다시 왕소금을 뿌려댄 격이 됐다. 허정무 대표팀 감독도 “팬이 무슨 욕을 해도 달게 받을 수밖에 없다. 할 말이 없다”고 했을까.
뼈를 깎는 반성, 작은 지혜라도 나누려는 열린 마음으로 축구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대의에 공감한다. 그러나 위기의 본질을 좀 더 깊이. 그리고 냉정하게 보는 사람들은 되풀이되는 공허한 수사에 지쳤다. 근본적인 혁신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말도 이제 지겹다. 적어도 대표팀의 경기 내용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한국축구는 크게 발전한 것이 없다. 비난을 퍼붓고, 비슷한 진단과 처방을 내놓고, 다시 일상으로 회귀하기를 반복했다.
사실 과도기 한국축구(대표팀)의 문제는 거스 히딩크 감독이 다시 지휘봉을 잡아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 감독을 바꿔서, 선수를 야단 쳐서, 시스템을 약간 고쳐서 될 수 있다면 백번이라도 하겠지만 해법은 결코 간단치 않다. 아우르기 어려운 가치들이 상충한다. 한번쯤 월드컵 본선을 제3자로 구경해 보자는 주장도 나왔지만 축구팬과 축구인들에게 월드컵 본선행은 당연한 상식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미안한 얘기지만 지도자의 능력은 특별히 나아진 것 같지 않고, 선수의 기량과 마인드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
한국축구의 현실에서 월드컵 본선행이라는 ‘절대목표’를 달성하려면 북한이나 중국, 중동 국가는 물론 아시아의 축구 선진국이라는 일본에도 훨씬 못 미치는 훈련 일수를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더이상 프로리그의 양보를 요구하면 안 된다는 대의도 쉽게 버릴 수 없는 중요한 가치다. 발을 딛고 선 현실은 여전히 척박하지만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역사의 시계바늘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돌아가 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쩌랴. 손을 놓고 한탄만 늘어놓을 수는 없는 것을. ‘다시는 축구를 안 보겠다’면서도 또 발길이 축구장으로 향하는 것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금 반드시 해야할 일을 찾아 보자.
먼저 허정무 감독은 결과로 드러난 자신과 대표팀의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쏟아지는 비판의 근거를 열린 마음으로 경청해야 한다. 축구선수는 물론 축구팬도 한눈에 알 수 있는 ‘허정무 축구’의 철학적, 전술적 기초와 ‘허정무호 대표팀’의 일관된 모델, 이를 통한 다양한 변형과 응용의 틀을 하루 빨리 내놓아야 한다. 허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에 뽑힐 선수는 어떤 자질과 체력, 정신적인 소양을 갖춰야 하는지, 또 대표팀에서는 어떻게 행동하고 경기장에서는 어떻게 뛰어야 하는지를 잠재적인 대표 선수 후보군이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혼자 힘으로 부치면 코칭스태프의 보강을 요청하거나 강호의 현자라도 찾아 나서야 한다.
대한축구협회도 늦었지만 이 참에 각급 대표팀은 물론 프로리그를 아우르는 한국축구의 기본을 재확립한다는 마음으로 팔을 걷어 붙여야 한다. 각종 잇속과 설익은 전문성을 앞세워 ‘만만한’ 국내 감독을 흔드는 안팎의 훈수꾼들을 물리치는 등 내부의 병폐를 과감하게 정리한 뒤 전임 감독에게 선수 선발과 팀 운용, 경기 운영에 대한 전권을 부여하고 결과에 대해 엄격하게 책임을 묻겠다는 명명백백한 원칙을 재확인해야 한다.
태극마크를 단 선수들도 자신들의 부족한 점을 직시하고 보완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한국대표팀의 주전자리를 꿰차기에도 벅찬 기량을 갖고 더이상 배울 것이 없는 대가의 흉내를 계속 낸다면 돌아올 것은 선수들이 평생을 깃들어 살아가야할 축구, 그 자체에 등돌린 팬의 야유밖에 없다. 팬의 인내심은 지금 폭발 직전의 상태에 와 있다.
눈물겨운 사랑과 헌신을 보여주는 축구팬은 이제 좀 기대 수준을 낮춰보자. 그리고 바로 그 현실적인 시선으로, 팬에게 기쁨과 의미를 안겨 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축구인들에게 격려를 보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자.
상하이(중국)에서·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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