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도진 '상왕 병', 국내 감독은 졸인가
2008년 10월 28일
세종과 부왕 태종의 시대를 다루는 방송 드라마 ‘대왕 세종’이 주말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다. 최근 드라마는 천체관측기구 혼천의와 한글의 발명을 매개로 상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계를 열려는 조선과, 그 조선을 영향권 아래에 묶어 두려는 명나라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드라마는 얼마 전까지는 상왕 태종과 세종, 이들을 둘러싼 신구 신료간의 권력 투쟁을 그렸다.
이회택 기술위원장과 허정무 국가대표팀 감독을 두고 최근 축구계에서도 ‘상왕론’이 화제였다. 두 사람은 축구계에서 드물게 두 차례나 ‘평화적 정권 교체’를 한 주인공이다. 이 위원장은 1992년 포항제철의 우승을 이끈 뒤 당시 ‘허 코치’에게 지휘봉을 물려줬고, 허 감독은 1998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름을 받은 뒤 한양대 체육부장이던 이 위원장에게 전남 감독직을 넘겼다. 지난해 12월 허 감독이 두 번째로 대표팀 사령탑에 오르고, 지난 7월 이 위원장이 기술위원장을 맡으면서 두 사람이 다시 얽혔다.
허 감독이 고전 끝에 2010년 남아공월드컵 아시아 3차예선을 통과한 뒤 기술위원장에 오른 이 위원장은 “축구계 화합”, “마지막 봉사”, “쓴소리” 등 단어를 동원하며 ‘감독을 도우면서 할 말은 하는 어른’으로 자신의 위상을 설정했다. 그로부터 3개월. 이 위원장의 언행은 취임 때 다짐과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취임 후 ‘베스트11 조기 확정론’을 주창한 이 위원장은 지난달 10일 북한과 최종예선 1차전 1-1 무승부 뒤엔 난데없이 ‘백패스 절대 불가론’을 들고 나오더니, 급기야 “코칭스태프와 선수간 신뢰에 문제가 있다”는 발언을 쏟아냈다. 특정 선수에 대한 불확실한 정보를 갖고,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전임 지도자의 선수선발에 그릇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심도 샀다.
그러나 한번 되돌아 보자.
2002년 한일월드컵 뒤 한국축구의 당면과제는 세대교체였으나 시기를 놓쳤다. 2002년 세대가 주축이 돼 치른 2006년 독일월드컵은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일깨워줬다. 지난해말 새로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허정무 감독이 목전의 성적이 아니라 2010 남아공월드컵이라는 장기적인 과제를 지향한 이상 젊은 피의 등용과 점검은 불가피했다. 지난 15일 아랍에미리트연합(UAE)전 쾌승은 허 감독이 주변의 반대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새로운 세대를 키웠기에 가능했다. 이런 점에서 이 위원장의 베스트11 조기 확정론은 한국축구의 과제에 대한 거시적 안목의 부족을 드러내는 논리에 불과했다.
백패스 절대 불가론도 그렇다. 기술위원회의 책임자는 백패스라는 ‘현상’이 아니라, 백패스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코칭스태프와 선수간 신뢰에 대한 지적도, 대선배가 곤경에 처한 후배에게 할 얘기는 아니었다.
요컨대 기술위원회의 수장은 일반팬도 할 수 있는 ‘단순 문제 제기’가 아니라 깊은 통찰을 통해 핵심 과제를 꿰뚫고, 현장 점검과 과학적 분석을 통해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자리다. 그리고 도출된 결론을 지혜롭고 신중하게 현장에 전달할 책임이 있다.
드라마는 태종과 세종이 권력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은 것으로 그린다. 그러나 정사가 전하는 태종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폐세자 양녕과 깊은 관련을 맺은 처남 민씨 형제, 세종의 장인이자 자신의 사돈인 심온을 숙청하는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고, 외부의 근심거리였던 대마도를 정벌해 아들 세종이 걸림돌 없이 자유로운 치세를 열 수 있도록 도운 군주였다. 반면 태상왕 태조는 화해와 도움을 청하는 태종의 사자(차사)를 ‘함흥차사’로 만들며 아들의 앞길을 어지럽게 했다.
개명천지에 상왕이니 뭐니 하는 왕조시대의 말 자체가 우습다. 그러나 창업기의 격랑을 나름의 방식으로 헤쳐나간 태조와 태종, 세종의 이야기는 오늘 축구계도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 UAE전 승리로 한숨을 돌렸지만 한국축구의 앞길 곳곳에는 여전히 암초가 널려 있기 때문이다.
'믹스트존-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0)‘사커 대디’여, ‘베타 대디’로 변신하라 (0) | 2014.04.18 |
---|---|
(129)프로팀과 대표팀 수당 1000만원과 6만원 사이 (0) | 2014.04.18 |
(127)축구장에 물 아닌 자성과 격려를 채우자 (0) | 2014.04.18 |
(126)이동국을 둘러싼 성남의 '불가사의' (0) | 2014.04.18 |
(125)안정환 고종수 이동국의 그후 10년 (0) | 2014.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