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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스트존-칼럼

(110)축구 잘 하면 정치도 잘 한다고?

축구 잘 하면 정치도 잘 한다고?

2008년 4월 18일



지난 9일 끝난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전후해 축구에 대한 정치권의 구애는 뜨거웠다. 축구계 인사들의 정치 진입이냐, 정치인들의 축구 활용이냐는 논란은 있었지만 한국사회에서 이처럼 공공연하고 폭넓게 축구와 정치가 '결합'한 경우는 드물었다. 이미 축구계 출신의 최고 권력자를 배출했고, 축구계의 담론이 정치적인 이슈로 순식간에 옮아가는 남미나 유럽의 경우처럼 한국 정치에서도 축구 용어나 현상이 인용되는 빈도가 잦아지고 있다. 국내·외 사례를 통해 축구와 정치는 왜 통하는지를 분석해 본다. 아울러 양자의 결합이 바람직한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 어떤 지향점을 가져야 할지에 대해서도 고민해 본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예선이 한창이던 1997년 차범근 감독이 이끌던 축구 국가대표팀이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가운데 축구팬 사이에 ‘차범근을 대통령으로, 하석주를 국무총리로’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당시만 해도 축구팬들이 국민에게 기쁨을 주는 축구를 통해 정치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2002년일월드컵에서 4강신화를 이룬 뒤 상황은 급변했다. 월드컵 유치와 성공적인 개최에 공헌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이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부상했다.


올해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몽준 회장은 서울에서 여당 후보로 나섰고, 곽정환 한국프로축구연맹 회장은 평화통일가정당의 총재로 정치의 한 복판에 섰다. 안종복 인천 유나이티드 사장은 여당의 비례대표 후보로 발탁됐다. 축구계의 여러 스타들은 정 회장을 비롯한 국회의원 후보들의 선거 도우미로 나섰다. 바야흐로 정치와 축구가 ‘통하는’ 세상이 됐다.


축구인들은 왜 정치에 다가서는 것일까. 정치인들은 왜 축구를 활용하는가. 축구와 정치의 미묘한 함수관계를 살펴본다.


◇한국사회를 뒤흔든 월드컵, 그리고 ‘W세대’


다른 스포츠 종목에 비해 유독 축구가 자주, 그리고 깊숙히 정치와 결합하는 이유로 전문가들은 먼저 축구의 대중성을 꼽는다. 국내 스포츠는 물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부문 중 지역과 세대를 뛰어넘어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 속에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 낼 수 있는 것은 축구가 거의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축구는 전 국민을 열광시켰고, 수백만명을 동시에 거리로 불러낼 힘이 있음을 보여줬다. 2002년 월드컵은 축구의 막강한 동원력 뿐만 아니라 국민, 특히 젊은 세대의 사고체계와 행동방식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월드컵을 통해 ‘광장’으로 진입한 월드컵세대, 즉 ‘W세대’는 그 뒤에 이어진 촛불집회, 대통령 선거를 통해 자신들이 나서면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축구의 힘은 가장 강력한 내셔널리즘


국가대표팀을 중심으로 한 축구의 내셔널리즘도 정치권이 주목하는 요소 중 하나다. 11명이 조직적이고 격렬한 몸싸움을 통해 상대의 영역으로 침투한 뒤 ‘골’이라는 최종적인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역동적인 스포츠인 축구는 흔히 전쟁에 대비된다. 이같은 축구의 속성 때문에 일제시대에는 민족적 울분을 표출하는 통로로 활용됐고 해방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는 과정에서는 국민을 하나로 묶는 장치로 환영받았다. 축구의 이런 역사성은 다가올 통일시대에 한민족의 진정한 화학적 결합을 촉진할 유일한 고리가 바로 축구라는 얘기에 설득력을 더한다. 한·일전과 남북통일축구가 최고의 흥행 카드로 주목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정치로 간 축구계 인사, 유권자의 대리만족 욕구를 자극하다


유권자들이 이명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은 중요한 이유가 청계천 복원으로 대표되는 가시적인 실적(능력)과 함께, 밑바닥에서 시작해 대기업 CEO를 거쳐 대권을 지향하는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의 축구영웅으로 ‘검는 표범’으로 불린 조지 웨아가 유럽무대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모국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 돌풍을 일으킨 과정도 비슷하다. ‘큰 판’에서 성공한 사람은 국민 전체의 생활을 책임지는 정치에서도 같은 역량을 발휘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축구가 생활문화가 돼 있는 유럽과 남미에서 이같은 현상은 두드러진다.


이탈리아 AC밀란 구단주이자 미디어 재벌 소유주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축구를 발판으로 최근 세 번째 총리에 올랐다. 총선 이틀 전인 지난 11일 호나우디뉴(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영입을 포함한 대대적인 AC밀란 전력보강을 발표한 것이 총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잉글랜드 첼시 구단주이자 러시아 최고의 부자인 ‘억만장자’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축구라는 ‘방패’를 활용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재벌 숙청’에서 살아 남았다.


축구가 산업으로 정착한 브라질의 펠레와 지코가 체육부장관을 역임하고, 파라과이의 칠라베르트가 정치적 영향력을 갖는 것은 대표적인 예다. 잉글랜드 맨체스터시티를 사들인 탁신 치나왓 전 태국 총리는 태국에서 인기 높은 프리미어리그의 후광을 활용했다. 지난해 12월 태국 총선을 통해 자신이 이끄는 ‘국민의 힘’ 당이 제1당에 오르자 2년 17개월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금의환향했다.


물론 축구 자체에 주목하는 사람도 있다. 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에 발탁된 안종복 인천 사장은 “유망주들이 해외에서 국위를 선양할 기회를 봉쇄하는 병역문제, 스포츠의 산업화를 가로막는 세제 등에 대해 정치인에게 입이 닳도록 얘기했지만 답이 없었다. 입법 과정에 직접 참여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통합민주당 이광재 후보의 선거운동원으로 직접 등록해 지원유세까지 한 신문선 명지대 교수는 “이 후보가 정치적인 식견은 물론 축구계의 현안을 해결할 논리와 능력을 갖췄다는 판단에서 지지했다”고 밝혔다.


◇축구를 잘 하면 정치도 잘한다?


축구의 속성이 정치와 상통하는 측면도 있을까.


안종복 사장은 “축구는 강한 인내심과 희생정신, 동료와 협력이 없으면 성과를 내기 어려운 특성을 가진 종목”이라면서도 “그러나 이것은 스포츠의 일반적인 속성이지 축구에서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축구를 잘하면 정치도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판단이 잘 안 선다”고 말했다.


이용수 세종대 교수도 “동료는 물론 상대도 인정해야 경기가 성립된다는 점에서 축구는 정치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최근 축구인의 정치 참여는 축구 자체의 속성과 논리의 확장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축구스타의 대중성과 스타성 등에 더 의존하는 흐름이 강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새 지향점=축구를 활용하는 정치인, 실질적인 체육 정책 내놓아야


한국의 정치인들이 축구에 주목하는 것은 축구 자체에 대한 애정과 관심보다 축구스타의 막강한 동원력과, 이들에게 투영된 이미지를 활용하려는 측면이 강하다는 지적도 있다. 축구인들의 도움을 받은 정치인들이 총선 과정에서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 관련 공약을 거의 내놓지 않았다는 점이 이같은 현실을 반영한다. 월드컵을 통해 확보한 인지도를 바탕으로 대권후보로 부상한 정몽준 회장은 가장 많은 축구인들의 지원을 받았지만 축구에 관한 직접적인 공약은 없었다.


브라질의 룰라 다 실바 대통령과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도 축구를 적극적으로 정치에 활용하지만 축구에 대한 담론을 정치에 원용하거나 축구의 산업화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나타낸다는 점에서 한국 정치인들과 대조적이다.

 

이용수 교수는 “불평등한 현실의 변화를 꿈꾸는 서민들에게 성공한 축구인은 선망의 대상이자 희망이 될 수 있다”면서도 “정치판에 들어가는 축구인이나 축구계 인사들, 축구를 활용하는 정치인은 이제 축구발전을 위한 제도적인 틀을 구축하는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축구인의 정치 참여를 찬성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이번 선거에 특히 축구인이 많이 도우미로 나선 것은 “선거운동 기간이 짧아 유권자의 선택이 정책보다 후보의 인지도, 이미지에 좌우된 것도 한 요인이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류재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