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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스트존-칼럼

(35)이영표 공개 발언, 베어벡호 약 된다

이영표 공개 발언, 베어벡호 약 된다

2006년 10월 17일



1998년 프랑스월드컵 본선을 앞둔 98년초 서울 잠실의 서울올림픽주경기장. 당시 대표선수 일부가 기자들이 몰려 있던 터치라인 부근으로 다가왔다. 밖으로 나간 볼을 받아 들고 돌아서던 한 선수가 말했다. “아니 형, 요즘 기자들은 왜 이래요. 다 죽었네. 죽었어.”


대표팀의 시스템, 대한축구협회의 지원에 문제가 있는데도 지적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뜻이었다. 선수들은 감독이 시키는대로 몸을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기자는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아, 이 사람들도 생각을 하면서 뛰는구나”하고 충격을 받았다.


이영표가 지난 12일 영국으로 출국하면서 선수 선발은 감독의 권한이라는 전제 아래 “(안)정환이 형이나 (이)운재형이 대표팀에 합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은 이름값만 아니라 기술적, 정신적인 실력을 갖췄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선배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베어벡 대표팀 감독이 “이영표도 소속팀에서 못 뛰면 안 뽑을 수 있다”는 엄포를 놓았던 것에 따른 동변상련을 토로한 것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이영표의 발언은 김남일이 해외파의 개인 플레이를 공개 비판한 것과 더불어 한국축구 현실에서는 다소 이례적으로 읽혀졌다.


우리 선수들이 각자의 상황에 따른 복잡한 심경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취재진이 인터뷰 중에 그 진한 느낌을 헤아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공개적이고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외국, 특히 히딩크, 본프레레, 아드보카트, 베어벡 감독의 모국인 네덜란드에서는 선수들이 감독의 선수 선발과 기용, 작전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것은 흔한 일이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1994년 미국월드컵을 앞두고 흑인인 루트 굴리트와 언쟁을 벌이다 “바나나나 먹어라(바나나는 원숭이가 먹는 음식이라는 뜻)”고 극언을 하는 바람에 인종차별 의혹을 받았고 이같은 인종간 불화 흐름은 ‘오렌지 군단’ 내에 이어져 98년 프랑스월드컵 때 네덜란드대표팀을 맡았던 히딩크 감독이 클루이베르트, 다비즈 등을 길들이기할 때까지 영향을 미쳤다.


틈날 때마다 한국선수들의 열정과 순종적인 성격을 칭찬한 히딩크는 이런 경험 때문인지 한국대표팀 사령탑 재임 때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 선수단의 단합을 꾀했다. 2002년초 한 신문이 ‘최용수 항명 의혹’을 보도한 뒤 히딩크가 소속 언론사 여기자의 모자를 벗겨 성희롱 시비에 휘말린 것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김정남 울산 감독도 1998년 중국 산둥 루넝 사령탑 부임 뒤 교체아웃된 선수가 신발을 내던지며 “푸차”라는 욕설을 해대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이장수 서울 감독이 중국에서 성공을 거둔 것도 따지고 보면 이같은 중국 선수들의 성향을 잘 알고 단속한 결과였다.


팀 전체의 조화를 깨고 공동의 목표 달성을 해치는 정도는 곤란하지만 우리 선수들도 이제 자신의 의견을 드러낼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2002년 월드컵에 비해 몰라보게 달라진 한국축구의 현실은 한 사람의 생각만이 아니라 구성원이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는 리더십과 팀 분위기를 요구한다. 2002년 월드컵 후 한국대표팀을 지휘한 코엘류, 본프레레 감독이 졸전 끝에 결국 임기를 채우지 못한 것은 감독 개인적인 능력의 문제와 함께 선수들의 수동적인 자세 때문이라는 뒤늦은 분석이 나오는 현실이다. 가깝게는 경기장 내에서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감독의 측면 공격 지시를 무조건 따르다 결국 무승부에 그친 지난 11일 시리아전 결과도 이같은 점을 시사하는 유력한 징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