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축구계 인사들의 신태용論, '영덕 촌놈'이 '리우의 난놈' 되려면
2016년 1월 29일
신태용(46) 올림픽축구대표팀 감독은 2016년 벽두 한국축구계에 가장 선명한 이름을 새긴 사람이다.
신 감독은 30일 오후 11시45분(한국시간) 카타르 도하의 알둘라 빈 칼리파 스타디움에서 벌어지는 2016 아시아축구연맹 U-23 챔피언십 결승에서 숙적 일본과 결전을 앞두고 있다.
지난 27일 카타르와 준결승전 승리로 세계 첫 8회 연속 올림픽 본선 출전권을 따냈다. 일본도 꺾고 아시아 정상에 오르면 더 좋겠지만 신 감독은 이미 많은 것을 이뤘다.
(#참고 : 신 감독은 하루 뒤 일본과 결승에서 2-0으로 앞서다가 3골을 내리 내주면 충격적인 2-3 대역전패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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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감독은 (성남)일화에서 여섯차례 리그 우승을 이끈 뒤 선수생활(401경기 99골 68도움)을 마감했고, 2010년과 2011년에는 친정팀 사령탑으로 각각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와 FA컵 정상에 오른 ‘원클럽맨’이다.
일화에서 신 감독과 함께 한 다섯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프로 입문 때부터 ‘선수 신태용’의 틀을 잡아준 박종환 감독을 비롯해 이장수, 김학범 감독이 그들이다. 두 전직 프런트는 이름을 안 밝히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이들은 신 감독의 성공을 한결같이 반기고 기뻐하면서도 신중한 언행을 당부했다.
한국축구의 주요 지도자로 급부상한 신 감독의 내일을 위한 애정어린 조언을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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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에서 리우데자네이루까지, ‘난놈’이 된 ‘촌놈’
신 감독의 고향은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다. 영해초등학교 졸업 뒤 강구중학교를 다니다 3학년 때 대구로 축구유학을 떠났다. 대구공고를 우승으로 이끌며 16세 이하 대표팀에 뽑혀 수도권팀의 스카우트 제의도 받기도 했으나 친구 2명과 함께 진학할 수 있는 영남대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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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대우(현 부산 아이파크)의 낙점을 받았으나 박종환 감독의 요청으로 곧바로 일화(현 성남FC)로 트레이드됐다. 일화에서 13시즌 동안 ‘직업이 주장’이라고 불릴 만큼 오랜 기간 팀의 리더로 활약하며 ‘그라운드의 감독’으로 불렸다.
그러나 유독 대표팀(23경기 3골)과는 깊은 인연을 맺지 못했다. 이런 이력 때문에 종종 “촌놈이 서울 와서 이 정도면 출세한 것 아닌가”라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던 신 감독은 2011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우승 뒤에는 자신을 “난놈”이라고 표현했다. 후일 “내 말은 ‘열심히 뛰어준 선수들 덕분에 내가 난놈이 됐다’는 것이었는데 와전됐다”고 정정했지만 맥락을 보면 그 선수들을 지도한 사람이 본인이니 듣는 사람이 ‘나는 난놈이다’라는 말로 이해한 것이 큰 무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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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감독이 브라질올림픽 본선무대에 서면 연세대와 고려대 출신이 아닌 첫 올림픽 본선 감독이 된다. 그가 브라질올림픽 본선에서 메달까지 따면 ‘촌놈’이 한국축구 핵심으로 진입하는 진짜 ‘난놈’의 시대가 열린다.
한국축구는 1948년 런던올림픽부터 10번째 본선에 나선다. 1996년 애틀랜타대회 때는 아나톨리 비쇼베츠(우크라이나) 감독이 지휘했다. 나머지는 연대 출신 5명(1948년 런던 이영민·1964년 도쿄 정국진·1992년 바르셀로나 김삼락·2000년 시드니 허정무·2004년 아테네 김호곤), 고대 출신 3명(1988년 서울 김정남·2008년 베이징 박성화·2012년 런던 홍명보)이 감독을 맡았다.
◇운과 복을 부른 지장(智將)
신 감독은 평소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복을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의 말대로 선수 신태용은 프로 입단 첫 해인 1992년 컵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이듬해부터 내리 3년, 2001년부터 또한차례 리그 3연패를 달렸다.
그라운드 밖에서도 자신이 복을 몰고 오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2014년 베스트일레븐과 인터뷰에서는 “내가 당구장에 가면 손님이 하나도 없다가도 10분이면 테이블이 꽉 찬다. 식당에 가도, 카페에 가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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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자기암시를 통해 주위 사람, 특히 선수들에게도 영향을 주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
일화의 전직 프런트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씨앗이 좋아도 비옥한 토양, 적당한 햇볕과 공기, 바람과 수분이 있어야 싹이 트고 꽃을 피워 충실한 열매를 맺는다. 이상하게도 신 감독은 매번 좋은 환경에서 일했다”면서 “찬찬히 생각해 보면 스스로 유리한 환경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주변 환경이나 사람들이 자신을 돕도록 바꿔놓는 능력이 탁월했다는 것이다.
◇태극마크에 대한 아쉬움,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기다렸는데…”
신 감독에게 23경기 3골에 그친 대표팀 경력은 늘 아쉽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네덜란드 출신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하자 태극마크에 대한 기대를 다시 걸었다. 2014년 베스트일레븐과 인터뷰에서 “1998년까지는 원망도 많이 했다. 히딩크 감독은 학연이나 지연에서 자유로운 분이니 나한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끝내 불러주지 않았다. 월드컵 전 해 리그 MVP 중 본선에 가지 못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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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 프런트는 “당시 우리는 리그 우승에 모든 걸 걸었다. 대표 차출 요청이 와도 응하기 쉽지 않았다”면서도 “2001년 리그 우승팀 일화에 월드컵 본선 출전선수가 전무했다는 건 좀 이상하다. 신 감독에겐 큰 상처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종환 감독도 “(신)태용이는 기량으로 보면 대표가 되고도 남았다. 그러나 결과가 그렇게 된 걸 곱씹으면 뭐하나. 나한테 부족한 점은 없었나를 돌아보면서 더 노력하는 계기로 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었겠나”라고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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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 회전 탁월한 ‘여우’
일화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신 감독의 놀라운 두뇌 회전에 감탄했다.
박 감독은 “선수 시절부터 야심도 강했고 욕심도 컸다. 당돌하고 머리도 좋았다. 다른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자주 했다. 팀 내 문제로 감독인 나도 고민하고 있는데 태용이가 뭔가를 탁 꺼내 놓아서 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이장수 감독은 “영리하고 판단이 빨랐다. 성격도 긍정적이고 밝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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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범 감독은 “경기장 안팎에서 발생하는 일도 알아서 척척 해결했다. 그렇게 했으니까 나하고 7년 반이나 함께 했다. 구단에서 태용이를 내보내라는 요구도 했지만 (고)차경복 감독님과 내가 안 된다며 버텼다”고 돌아봤다.
일화 시절 프런트는 “머리가 비상했고 의사결정이 빨랐다. 권위를 내세우다가도 필요할 때는 확실히 고개를 숙였다. 윗사람이 원하는 걸 정확히 파악해 잘 모셨다. 여기서 신 감독의 힘이 나왔다”고 귀띔했다. “절차를 무시하고, 최고결정권자와 담판해 실무자를 당황하게 한 적도 있었다”는 그는 “월권의 성격이 짙었지만 신 감독 입장에서는 시간낭비를 줄이고 효율을 취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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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한 승부욕, “성남 라커룸에서 쓰레기통도 던졌다”
감독 시절은 물론 선수 때도 조직 생리와 상대 심리를 꿰뚫어 때로는 돌발행동도 하며 선수들을 쥐락펴락했다.
박 감독은 “태용를 싫어하는 선후배가 거의 없었다. 솔선수범하며 일을 다부지게 처리하니 토를 달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사람을 끄는 힘이다. 다른 것은 노력이나 주변의 도움으로 채울 수 있지만 리더십은 갖고 태어나는 것”이라며 “선수 때부터 상대 심리를 간파해 적절히 활용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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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 관계자는 “선수 장악력이 탁월했다. 상대를 휘어잡으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것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경기가 안 풀리는 날 실수한 선수 당사자가 아닌 팀의 중심 선수를 타깃으로 삼아 질책했다. 다른 선수들은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일부러 쓰레기통을 집어 던진 날도 있었다.
승부욕이 강했고 감정 표현에도 솔직했다. 패배에는 분노를, 승리에는 기쁨을 분방하게 드러냈다. 선수 시절 최고 연봉을 받았는데 협상 때마다 집요한 요구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었다. 협상이 어려워지면 스스로 새 시즌에 옵션을 걸었고, 약속을 지켜 끝내 뜻을 이뤘다.
◇카타르전 스리백, 승리보다 중요한 원칙은 없다
공격축구 신봉자인 신 감독은 카타르와 준결승전 전반 스리백을 기본으로 한 3-4-3 포메이션을 들고 나왔다. 요르단과 8강전에서 전반 선취골을 넣고도 후반 상대 공세에 밀려 졸전을 한 것에 대한 대응책이자, 한 경기로 본선 진출권이 좌우되는 상황에서 꺼내든 회심의 카드였다.
2015 코파아메리카 결승에서 칠레 경기를 본 신 감독은 당시 영상을 선수들에게 보여주고 카타르전에 대비했다. 스리백으로 전반을 마친 뒤 후반에는 포백을 적절히 활용해 상대의 예봉을 꺾고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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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주장에는 귀를 활짝 열었고 소통에도 능했다. 선수들의 말이 맞으면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팬과 미디어, 구단 프런트와 관계도 우호적이었다. 팬 미팅에 적극적으로 참가했고, 메시지가 분명한 인터뷰로 기자들의 마음을 샀다. 구단 직원들에게 가끔 떡을 돌리거나 회식용 봉투를 건네 불필요한 갈등을 미리 막았다.
◇레슬링복에서 두루마기까지, 퍼포먼스의 끝은?
깜짝 퍼포먼스는 신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다. 친정팀 감독 부임 첫 해인 2009년 홈 첫 승리를 거두면 쫄쫄이 레슬링복을 입겠다고 공언한 뒤 실행했다. 같은 해 11월 레드카드 뒤 출전정지 징계를 받자 전남과 K리그 준플레이오프에서 관중석으로 올라가 무전기로 선수들을 지휘했다. 경기를 승리로 이끌자 ‘무전기 매직’이라는 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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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에 손을 넣고 인터뷰하는 장면을 본 아내에게 야단을 맞았다거나, 부적절한 문구가 씌여진 모자를 썼다가 아들의 지적을 받고 뒤집어 썼다는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한다.
이번 대회 전 일간스포츠와 인터뷰에서 “결승에 올라 본선행이 확정되면 한복을 입을까 한다. 설날도 가까워 오니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일본전 벤치에서 정말 두루마기를 입을지는 알 수 없지만 현실화되면 또 화제를 모을 것이 분명하다.
◇‘1.5인자 감치’의 튀는 끼, 슈틸리케호에서도?
선수단이 카타르로 떠난 뒤 서울에서 만난 한 축구 원로는 신 감독의 언행에 걱정스런 기색을 드러냈다. 사령탑, 특히 대표팀 감독은 태산같은 무거움으로 선수들에게 신뢰를 주고 돌발상황에 대비해야 하는데 가벼운 것 아니냐는 뜻이었다. ‘침대축구’ 등 직설적 표현으로 상대를 자극하는 것은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걱정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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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환 감독은 “어린 선수들을 데리고 나라를 대표하는 일의 책임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며 “감독은 희생하고 봉사하는 심부름꾼이다. 자기 중심으로 세상을 재단하려면 탈이 날 수 있다. 말을 아끼고 행동도 신중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학범 감독은 “일종의 심리전이었다면 우리 선수와 상대에게 모두 먹혔고 성과도 냈으니 잘했다고 할 수 있다”며 “감독은 결국 성적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무한책임을 지겠다는 각오와 소신이 있으니 그랬을 것”이라고 두둔했다.
감독과 코치를 합친 ‘감치’라는 조어와 1인자 감독과 2인자 코치 사이의 존재를 의미하는 ‘1,5인자’라는 말도 나돈다.
박 감독은 “A대표팀에 복귀하면 코치로서의 역할과 한계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김 감독도 “A대표팀은 올림픽팀과 또 다르다. 분란이 안 생기도록 언행을 조심하고 현명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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