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애에 이영표 같은 축구선수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2013년 11월 14일
<아래 글은 2013년 11월 14일 이영표가 선수생활 은퇴 관련 기자회견을 한 뒤 쓴 글입니다. 뒤늦게 갈무리합니다. 이영표는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KBS 해설을 맡아 차분하면서도 날카롭고, 따뜻한 해설자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팬의 기대대로 그는 월드컵 기간 중 '가장 뜬 사람' 중 하나가 됐습니다.>
이영표가 2013년 11월 15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스위스 평가전 하프타임에 은퇴식을 갖고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축구선수 중 한 명인 이영표(36)가 14일 오전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은퇴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현장에서 취재했던 후배에게 들으니 이영표는 담담하지만 열정적으로, 솔직하지만 품위있게 심경을 밝혔다고 합니다.
저는 현장에 있었던 한 기자가 했다는 위 질문 속에 이영표를 떠나보내는 축구판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전에 포스팅한 글에서 이영표를 '제가 직접 본 축구선수 중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두 명 중 한 명'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여긴 사적인 공간이니 뭐 이 정도 커밍아웃은 괜찮겠지요?
한국 현대축구에서 이영표가 차지하는 위상과 가치를 입증하듯 회견 후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중 두 꼭지를 링크합니다. 하나는 회견장의 분위기와 발언내용을 잘 정리한 스포츠서울 도영인 기자의 기사입니다.
떠나는 뒷모습마저 아름다웠던 이영표 "미안하고 고마웠습니다"
http://www.sportsseoul.com/?c=v&m=n&i=42194
다른 하나는 이영표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감사의 글'을 포함한 일문일답을 가장 충실하게 옮긴 풋볼리스트의 기사입니다. 링크하지는 않았지만 서호정 기자가 이 글의 첫머리와 같은 제목으로 쓴 피처기사도 공감이 갑니다.
[이영표 은퇴 기자회견 전문]"한일전에서 모두 이기지 못한 게 아쉽다"
http://footballist.co.kr/bbs/board.php?bo_table=press&wr_id=6342
이영표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은 분은 아래 링크를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어렵고 무모한 짓입니다. 그래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영표는 '축구를 둘러싼 사회.문화.종교적 가치를 이해하고 이를 내면화한, 영성과 지성에 축구실력을 겸비한 구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 과한 표현이 아니냐고 할 분도 있겠지만 페친 여러분께서 이영표를 직접 대면해볼 기회를 갖게 되면 제 말의 의미를 이해하실 겁니다.
이영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입니다. 이번 회견에서 종교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예전 저는 이영표와 얘기를 하면서 그가 매우 견고한 신앙의 토대 위에서 축구를 비롯한 자신의 인생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영표를 떠올리면 저는 십자가 신앙을 대표하는 미국의 복음 증거자 월터 J. 챈트리가 쓴 책 '자기 부인'(Shadow of the cross : studies in self denial)이 생각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자아를 죽이고, 이 과정을 거친 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순전한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 책의 요지입니다.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극기복례(克己復禮)도 연상됩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지요. 수행 중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殺彿殺祖)'는 당말 고승 임제 의현의 어록도 유명합니다. 처음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이영표가 이처럼 창대하게 된 이면에는 처절한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홍명보 감독이 오늘 대표팀의 새 주장으로 이청용을 선택했다는 뉴스가 나왔는데요.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앞두고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 주장 자리를 두고 이영표와 먼저 상의했는데 당시 이영표가 후배인 박지성을 적극 추천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입니다. 제가 감독이라도 이영표와 박지성 중 누구를 주장으로 삼을지 고민스러웠을 겁니다. 이영표가 자기를 희생하면서 이 문제를 잘 정리해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의 밑거름이 됐죠.
축구선수에게 은퇴는 일반인이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힘든 일입니다. 기자회견 중 은퇴 시기와 관련된 언급을 통해 우리는 상황에 대한 이영표의 냉철한 인식과 고심 끝에 중심을 잡는 결단력을 알 수 있습니다.
동료 선수, 팬, 가족, 축구 행정가 등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소통 능력도 대단합니다. 저는 이영표의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처음 인연을 맺은 뒤 한번도 헤어지지 않고 함께 한 기자 출신 에이전트인 지쎈의 김동국 사장의 공헌도 매우 컸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글이 길어졌습니다. 이영표에게 영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줄리아노티가 쓴 '축구의 사회학'(Football : a sociology of the global game) 중 한 부분을 전하고 싶습니다. 줄리아노티는 '플레이의 종착역, 스타덤인가 어둠으로의 복귀인가?'라고 물은 뒤 예전에는 은퇴한 스타가 대중적인 '죽음' 속에서 절망했지만 최근에는 영상매체를 중심으로 발달된 미디어와 팬의 기억 속에서 신화로 재생되면서 불멸의 존재로 변해간다고 썼습니다.
선수로서는 불멸의 세계로 진입한 이영표가 축구인생의 또다른 국면에서도 우리에게 기쁨과 영감을 주기를 바랍니다.
<아래 글과 사진은 2013년 11월 29일 이영표 유니폼을 받고 기쁨에 겨워 제 페이스북에 올린 것입니다.>
올해 들어 받은 최고의 선물이다. 지난 15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스위전에서 은퇴식을 치른 이영표의 한정판 은퇴기념 유니폼이다.
이영표의 친필사인, 그의 경기장면 사진에서 따온 그래픽, '이영표 은퇴 기념'이라는 영문, 축구 대표팀의 슬로건인 '투혼'이라는 한글과 KFA 문양까지. 완벽하다.
당초 이 유니폼을 받은 후배가 "나도 갖고 싶었지만 곰곰 생각해 보니 이영표를 진짜 좋아하는 선배에게 맞는 물건인 것 같다"며 건네줬다.
그동안 이런 일이 있을 때면 후배에게 베풀고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이번엔 겸양의 덕과 선배의 체통도 가볍게 내던져버리고 냉큼 접수했다.
'제왕은 무치'라고 했다는데 이영표 앞에서는 선배도 무치닷.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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