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22일
지난 주말 서울 인근의 주말농장 텃밭 대부분이 '시농제(始農祭)'를 열고 본격적인 한 해 농사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제가 10년째 '도시농부'로 땅을 일구는 힐링 공간인 노원구 중계동의 '천수 주말농장 텃밭 농원'에서도 22일 '노원도시농업협의회' 주최로 회원과 인근 주민들이 모인 가운데 '시농제'를 지냈습니다.
<마명선 노원도시농업협의회장님(천수주말농장텃밭농원 대표)이 지난 22일 열린 '시농제'에서 축문을 읽고 있습니다. 상 위에는 호미와 솔가지, 돼지머리와 막걸리가 놓였습니다.>
도시농부 10년차를 맞은 저는 올해는 평수는 대여섯평으로 줄었지만 토질은 훨씬 좋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최소한 몇년은 갈아엎지 않겠다는 사장님의 언질을 받고, 제 속셈으로는 이제 여기 땅만 파먹어야겠다는 작정을 했습니다.
지난해 산자락 귀퉁이 밭에 심어둔 더덕과 도라지 각 30여뿌리에다 취나물, 당귀, 부추, 돌나물 등 다년생 식물을 일찌감치 옮겨 심었고 일년생 식물을 심을 4월초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새 봄을 맞아 일찌감치 고개를 내민 다년생 식물 신선초입니다.>
돌아보니 주말농장 풍경은 지난해부터 크게 달라졌습니다. 지역에 산재한 주말농장과 아파트 옥상을 이용한 텃밭 등을 엮는 활동가들이 주목하면서 구청과 협의 모임이 생겼고, '농한기'인 한겨울에도 김장독을 묻는 프로그램이 가동됐습니다. '시농제'가 시작된 것도 지난해부터입니다. 한 해 농사를 시작하면서 풍작을 기원하고 회원과 마을주민간 친교를 나누는 행사인데요.
오늘 생각해볼 이야기도 바로 이 '시농제'에 대한 것입니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초봄에 치르는 의식인 '시산제(始山祭)'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 이 말은 제가 사는 동네 뿐만 아니라 전국의 여러 곳으로 급속히 퍼지면서 이미 도시농부들 사이에서 시민권을 획득한 듯 합니다.
<노원도시농업협의회원들이 풍물을 치며 마을을 돌고 있습니다. 뒤에 걸린 플래카드에 문제의 '시농제'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이 와중에 '시농제'라는 용어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도 있습니다. 특히 최고의 궁궐 전문가이자 세시풍속에 정통한 홍순민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님은 각종 문헌과 용례를 살핀 뒤 애정어린 대안까지 내주셨습니다.
홍 교수님에 따르면 옛날 농촌에서도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의식이 있었지만 집단이 아니라 집안마다 치렀고, 이 의식에 무슨 특별한 명칭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소박한 고사 정도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시농'이라는 말의 본래적 의미도 단순히 한 해 농사의 출발이라는 뜻보다는 산업으로서 농업을 시작한다는 뉘앙스가 강하다네요. 중국의 삼황 중 하나인 신농씨(神農氏)가 농사를 처음 가르쳐 줬다는 식의 화법으로 들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조선시대에 행해진 국가 제사가 선농단에서 지낸 선농제(先農祭)였답니다.
'농사를 짓는다'는 말에 가까운 글자로는 '농(農)'이 아니라 '밭을 간다'는 뜻을 지닌 '경(耕)'이 더 적합하다고 합니다. 봄에 땅을 새로 갈아 농사를 시작한다는 용례로는 '춘경(春耕)'이라는 말이 더 일반적이었다는 것이 홍 교수님의 문헌학적 해설입니다.
'제(祭)'라는 글자도 신격화된 존재에게 드리는 제사의 의미가 강하다네요. 제사가 아닌 의식에 쓰는 글자로는 '례(禮)'나 '의(儀)'가 부합하고요.
홍 교수님은 이와 함께 '고경(告耕)'이라는 말도 추천합니다. 조선시대에 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3년이 넘도록 비어있는 땅을 경작지로 만드는 것을 허락했는데, 대신 관에 고하게 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돌나물입니다. 한겨울 땅 속에서 숨 죽이고 있다가 꽃샘추위도 이기고 초록색 잎을 내밀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홍 교수님은 '시농제'를 대신할 말로 '춘경례(春耕禮)' '춘경의(春耕儀)' '고경례(告耕禮)' '고경의(告耕儀)' 이렇게 네가지를 들었습니다. 저는 '춘경례'가 가장 마음에 들고 그럴싸해 보입니다.
혹시 한글전용을 주장하는 분 중 '새 용어를 만들면서 왜 굳이 한자를 써야 하나. 한글로 하면 더 좋지'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순한글 용어로 뭐가 좋을지에 대해서는 퍼뜩 떠오르는 대안이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여지를 남겨둘 수밖에 없네요.
용어 하나에 뭐 그리 집착하느냐고 하실 분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말이라는 것이 한번 사람들의 입과 머리에 굳으면 좀처럼 바로잡기 어려운 것이어서 처음부터 현실에 부합하는 정확한 것을 골라야 한다는 점에서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해 이런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저도 크게 공감했습니다. 올해 들어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이 말이 확 퍼져 고치기 어려운 지경까지 가는 것을 보니 이제라도 본격적인 논의를 해야할 필요성이 더 크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사족입니다만 이미 일반화된 '시산제'라는 단어는 어떨까요. 여기에도 문제가 좀 있다고 하네요. 같은 논리의 연장에서 홍 교수님께 "그럼 '춘등례(春登禮)'는 어떻습니까"하고 여쭈니 '좋아요'를 팍 눌러주셨습니다.
<봄을 맞아 토양이 포실포실해졌습니다. 검붉은 색깔이 좋은 땅임을 한눈에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논의가 오간 공간이 페이스북 담벼락이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립니다. 논의의 내용과 과정을 직접 살펴 보고 싶은 분은 홍순민 교수님의 페이스북 계정(https://www.facebook.com/hsminjx?fref=nf)을 찾아 친구 신청을 하면 좋겠습니다. 홍 교수님의 친구 허락을 받아 팔로잉을 하다 보면 우리 역사와 풍속, 문화유산에 대한 깊은 영감과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초 3월 22일에 썼던 글을 하루 뒤인 23일 내용을 보강해 다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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