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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스트존-칼럼

(136)박종환 감독의 '꿀밤'과 자진 사퇴가 남긴 교훈

박종환 감독의 '꿀밤'과 자진 사퇴가 남긴 교훈

2014년 4월 22일


세월호 침몰사고로 온 국민이 깊은 슬픔과 분노, 무력감에 잠겨 있는 가운데 축구계의 치부까지 드러나 답답합니다.


프로축구 성남FC는 22일 국내 프로 스포츠 최고령 사령탑인 박종환(76) 감독이 선수 폭행과 관련해 "해당 선수들과 그 가족에게 사과의 뜻을 전하며 모든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발표했습니다. 박 감독은 또 구단을 통해 “이번 일로 고통받은 김성준, 김남건을 비롯한 모든 선수단과 성남FC 팬에게 죄송하다"는 말도 했다고 전했습니다.


지난 1월 25일 성남FC 창단식에서 나란히 선 신문선 대표, 이재명 구단주(성남시장), 박종환 감독. 이들의 의욕적인 출발은 박 감독의 폭행이라는 돌발변수와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잘못된 만남'이 돼버렸다.                                       사진 by 성남FC


이번 박종환 감독 사례에서 드러난 지도자의 폭력 문제는 축구계에서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할 사안입니다. 폭력은 단순히 축구장을 비롯한 스포츠 현장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기본적인 가치로 삼고 있는 인권에 악영향을 미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번 사태 전개 과정에서 드러난 박 감독측의 거짓말과 은폐 축소,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피해자 강박, 말 맞추기, 편 가르기, 정치적 이해득실 따지기 등 고질적인 병폐를 보면 사태의 심각성은 더합니다.



박종환 감독의 폭행 사태, 결국 올 것이 왔다!


지난 17일 박종환 감독이 전날 탄천종합운동장에서 벌어진 성균관대와 연습경기에서 0-2로 뒤진 채 맞은 하프타임에 미더필더 김성준(26)과 신인 김남건(24)의 얼굴을 수차례 주먹으로 때리고 빰을 쳤다는 사실이 성남 구단 홈페이지와 언론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폭행 사실을 부인하던 박 감독이 '신체접촉'을 인정한 뒤 "꿀밤을 몇대 줬다. 내가 취임한 뒤 우리 선수들의 기가 죽을까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선수를 얼마나 아꼈는데"고 변명했다는 말을 전해들은 뒤 필자의 머리에 든 생각은 '결국 올 것이 왔다'는 한마디였습니다.


알려진 것처럼 박 감독은 일화 감독 시절인 지난 1989년 8월 15일 럭키금성전에서 심판을 폭행해 남은 시즌 경기 출전정지 징계를 받았고, 대구FC 감독 시절인 2003년 7월 18일에는 경기 뒤 심판실에 난입해 소동을 벌이는 등 심판과 선수에 대한 폭력으로 여러차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 때마다 박 감독은 부인과 은폐로 위기를 넘기려 하다가 사실이 드러난 뒤에는 "선수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서 그랬다"고 궁색한 변명을 하곤 했습니다.


제가 직접 겪은 일입니다. 이번 일을 대하는 제 심정은 언젠가 한번 경험한 일 같은 느낌, 즉 데자뷰 그대로입니다.

박 감독이 대구FC를 지휘하던 2003년이었을 겁니다. 경기 전 안양종합운동장에서 만난 박 감독은 본인 입으로 "며칠 전 선수들이 하도 정신을 못 차리기에 몇 놈을 패면서 혼구멍을 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그 자리에는 선배 기자 한 분도 있었는데요. 깜짝 놀란 제가 "아니 선수를 때렸다는 말입니까?"하고 묻자 박 감독은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때린 것이 아니라 꿀밤을 준 거야"라고 말을 바꿨습니다. "선수에게 손을 대면 됩니까"라는 거듭된 질문에 그는 "그런 걸 갖고 뭘 그래. 내가 애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데. 다 지들 잘 되라고 한 건데"라고 말했지요.


2000년대 초반 대학과 고교축구가 열리는 현장인 효창운동장을 자주 찾아 취재를 했습니다. 대학축구연맹전 8강전이 끝난 뒤 효창운동장 본부석 왼쪽 맞은 편에 있는 매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곳에는 경기를 끝낸 팀 감독과 각 프로축구단 스카우트, 에이전트, 그리고 취재기자들이 모여서 한담을 나누곤 했습니다. 8강전에서 탈락한 한 감독이 아쉬운 듯 한숨을 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습니다. "전반전이 끝난 뒤 하프타임에 해야 했는데 말이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후반전에 그냥 내보냈는데 결국 지고 말았어요." 폭행을 해야 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학부모가 대부분인 관중과 취재진이 보는 데서 어린 선수들을 폭행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여러차례 기사를 쓰곤 했지만 가벼운 징계로 넘어갔고, 같은 일이 재발하곤 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저는 위 대학 감독의 말을 듣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스포츠 폭력의 메커니즘과 그 배경의 논리 구조


짐작하실 테지만 옛날 일을 거론한 이유가 있습니다. 스포츠에서 폭행 사태가 있어나는 메커니즘과 그 밑에 깔린 논리를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사태 후 박 감독이 말한 '꿀밤'이라는 단어 속에 담긴 의도가 문제입니다. 일부 스포츠 지도자들과 학부모, 심지어 피해자인 선수들까지 폭행을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꿀밤', 즉 훈육의 방법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좀 과격한 훈계를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폭행이 선수의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고, 결과적으로 그 선수가 속한 집단의 인권지수와 평판을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요소로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파문이 커지자 이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언행에서 드러나는 또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폭력의 배경에 깔린 논리 구조입니다. 폭력을 경기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인식하는 것이지요. 박 감독이나 위 대학 감독은 전반전이 끝난 뒤 전술적인 문제를 짚거나 경기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전략 구상을 제시하며 설득하는 대신 경기에서 문제를 일으킨 선수를 골라내 폭행이라는 극단적인 '자극'을 주고, 그 긴장감과 공포심이 팀 전체로 퍼져나가게 해 팀 워크를 다지는 한편 선수 개개인에게는 한계 체력 이상의 플레이를 끌어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종환 성남FC 감독이 지난 2월 진주 전지훈련 중 선수들에게 손수 김치찌게를 만들어주겠다며 김치를 썰고 있다. 취임 당시 '강압적 선수단 운영'을 염려하는 취재진에게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의 이야기"라고 일축했던 박 감독은 폭행 사태와 이후 대처 과정에서 구시대적 인식을 드러내며 오랜 지도자 인생을 불명예 속에서 마감하게 됐다.                                                             사진 by 성남FC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만 폭력과 함께 정부가 스포츠계 4대악으로 꼽는 성 추행이 끊이지 않는 것도 사실은 같은 논리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부 지도자들은 선수, 특히 여성 선수의 경우 경기 전 성적 흥분을 고조시키면 몸이 풀리거나 경기력이 올라간다, 아울러 지도자와 선수간의 유대와 신뢰가 강화된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하고 다녔습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지도자가 선수를 폭행하거나 성 추행을 하는 것은 일시적인 화풀이나 뒤틀린 성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지도자가 선수를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할 수 없이)하는 일이 되는 것이죠.


이번 박종환 감독 사태가 이런 주장들이 어떤 스포츠 과학적인 근거도 없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며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스포츠계가 재확인하고 경각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스포츠는 보편적인 가치가 통용되지 않는 특수한 영역이다?


뒤늦게나마 자진 사퇴로 사태가 마무리됐지만, 이번 일을 다루는 이재명 성남시장을 비롯한 '일반인'의 그릇된 시각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남FC의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이자 구단주이기도 한 이 시장은 사건이 터진 뒤 6일째가 될 때까지 시간을 끌었습니다. 인권변호사 출신이라는 그가 단호한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시장은 박 감독 경질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한 축구단의 결정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즉각 받아들이지 않았고, 신문선 대표의 면담 요청을 외면했습니다.


지방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정치적인 유불리를 저울질한 것으로 보입니다. 인권에 관련된 심각한 사안을 두고, 올해 초 박 감독을 추천을 한 것으로 거론됐던 인물과의 의리나 인간적인 관계 차원에서 바라봤다는 의구심도 지울 수 없습니다. 축구계 사정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이 인물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금방 짐작할 겁니다.


새누리당의 정몽준 서울시장 예비후보가 21일 세월호 침몰과 관련된 아들의 페이스북 글이 문제가 되자 즉각 SNS를 통해 사과를 하고, 국회에서 직접 기자회견까지 열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이 시장의 사태 판단이 얼마나 안이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시장이 초반부터 우리 사회의 상식이 된 인권이라는 가치에 입각해 단호하고 선제적인 조치를 취했다면 이 사건이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이 시장의 윤리의식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한편, 구단 운영의 새로운 비전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정치적으로도 득이 됐을 것이 분명하고요.


이재명 시장은 이번 일을 축구단에 대한 자신의 평소 인식을 근본적으로 재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겁니다. 심신의 상처를 받은 선수와 축구팬, 성남 구단 분들에게 위로를 보냅니다. 박종환 감독도 변화한 시대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명예롭게 지도자 인생을 마감할 수 있는 쓴 약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이 불행이 축구계 종사자는 물론 우리 사회 구성원이 스포츠와 인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애정과 관심을 더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