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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스트존-칼럼

(120)고 이종남 기자 2주기와 한국의 스포츠 기자

고 이종남 기자 2주기와 한국의 스포츠 기자

2008년 6월 24일



지난 5일은 한국 스포츠 기자의 획을 긋는 야구전문기자였던 고 이종남 기자의 2주기였다. 2004년 스포츠서울 퇴직 때 직급은 ‘이사’였지만 그를 ‘기자’ 또는 ‘선배’로 부르고 싶어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1977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경향신문을 거친 그는 1985년 창간된 스포츠서울로 옮긴 뒤 기자 인생의 절정기를 맞았다. 30권이 넘는 저서와 번역서 대부분이 스포츠서울 시절 나왔다.


고 이종남 기자가 스포츠서울 편집국에서 일할 때 찍은 사진이다.<사진 출처 : 스포츠서울>


그가 유명을 달리한 2006년 6월 5일. 독일월드컵 개막을 앞둔 그 때 기자는 축구국가대표팀과 함께 영국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 있었다. 6월 4일(현지시간) 에딘버러에서 열린 가나와 평가전을 취재하려고 에딘버러와 글래스고를 오가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6월 6일 쾰른에 베이스캠프를 차린 선수단을 따라 독일에 입국해서야 부음을 들었다. 출장 전 “독일에 다녀와 드릴 말씀이 있다”는 기자의 말에 “나도 꼭 해줄 말이 있다”던 전화통화 내용을 떠올리고 비통했다.


그가 차장으로 재직하던 야구부에서 수습기자 시절을 포함해 4년 가까이 가르침을 받았건만 이번 2주기에도 다른 선·후배와 지인들이 유택을 찾은 것을 또 뒤늦게 알았으니. 무심함에 가슴을 쳤다.


속 표지에 ‘류재규 학형 혜존  드림’이라고 또박또박 쓴 그의 책을 넘겨 보며 과연 스포츠 기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자문한다. 그를 통해 한국의 스포츠 기자상을 그려본다. 부디 고인에게 욕이 되지 않기를, 고인을 기리는 사람들에게는 옷깃을 여미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전문성=서울대 동양사학과 재학 시절 학교 대표 야구선수였던 그는 스포츠서울 지면에 국내 최초로 기록표(땅표)를 실었고 본격적인 피처, 분석, 논평기사와 칼럼을 통해 한국 스포츠 언론의 새 지평을 열었다. 현직 프로야구 감독의 오류를 지적한 야구지식, 생동감 넘치는 문장은 스포츠 기사의 모범이었다. 자료가방을 끼고 야구장을 출입하면서 얻은 ‘채권장수’라는 달갑잖은 별명도 그에겐 영예로운 호칭이었다. 10년이 넘게 OB(현 두산) 출입기자를 한 고집도 전문성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을까.


고 이종남 기자가 2005년 5월 7일 문학구장에서 열린 LG-SK전에 앞서 시구한 뒤 마운드를 내려오고 있다. 왼쪽은 당시 SK 포수 박경완, 오른쪽은 최종준 단장. 제물포고를 졸업한 이 기자는 인천야구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인천 야구 이야기'라는 책을 썼다.<사진 출처 : 스포츠서울>


●당파성=야구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지만, 야구의 이익과 대의에 어긋나는 일에는 격분했다. 그러나 그 당파성이 야구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 평가에서 밀린 체육 일반, 약자의 편에 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차범근 수원 감독이 공군 소속이던 1978년 병역문제 때문에 독일 분데스리가행이 난관에 부딪히자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2000년 1월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출범을 전후해 선수의 입장에서 여론을 주도한 것도 그가 이끌던 스포츠서울이었다. 이광환 전 LG 감독(현 우리 감독)과 의형제로 불릴 만큼 가까이 지낸 것도 이 감독이 주창한 자율야구에 크게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현장성=평기자 시절은 물론 데스크와 저술 활동으로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잠시라도 틈이 나면 경기장을 찾거나 경기인을 만났다.


●비판정신=“편견의 극심함에, 인간미의 결여됨에 무수한 비난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 책을 펴내기로 했다. (중략) 최근 언론의 보도상황에 대한 비판에 직접 대거리해 보기 위함이다. 기자들은 ‘하이에나’라고 한다. (중략) 왜 살아있는 자, 현직에 있는 사람은 그릇된 것이 있어도 그냥 넘어가야 하는가. (중략) 잘못된 사항이 있으면 지적하고 힘쓰고 있을 때 그것을 지적하는 게 오히려 떳떳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출판을 강행할 용기를 갖게 된 근거였다.”(1995년 그의 저서 ‘이중노출’의 책머리에)


●낭만적인 영혼=이어폰으로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을 들으며 야구경기를 보자던 그의 칼럼을 사람들은 아직 기억할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류재규 축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