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축구손님과 '대결'만 할 건가
2008년 6월 18일
남과 북이 오는 22일 오후 8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1990년 10월 23일 남북통일축구 2차전(잠실) 이후 17년 8개월만에 축구 A매치 서울 경기를 펼친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아시아 3차예선 마지막 경기다. 이 경기에 앞서 남과 북은 1993년 미국월드컵 예선 이후 15년만에 최종예선에 동반 진출했다. 한국은 주요 선수들을 정상적으로 내보낼 전망이고, 북한도 ‘인민루니’로 불리는 정대세와 ‘세르비아 특급’ 홍영조 등 베스트멤버를 총가동한다. ‘축구 축제’를 벌일 준비를 모두 갖췄다.
그러나 이날 경기를 기다리는 남과 북 선수단의 표정은 딱딱하다. 남과 북의 코칭스태프는 오는 27일 조추첨 결과에 따라 최종예선에서 다시 만나 본선행을 다툴지도 모르는 상대의 기를 미리 꺾어두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것 같다. 대한축구협회의 관계자도 “이번 경기는 말 그대로 축구경기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축구를 남과 북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의 축소판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 역시 경기 외적인 요소를 고려할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승부에서 좀 비켜나 있을 법한 붉은 악마 관계자 역시 “평소 해오던 대표팀 응원 외에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한 게 없다. 외부에서 한반도기를 쓰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태극기를 쓰기로 했다”면서 “지난 2월 동아시아대회 맞대결에서 드러낸 답답증을 이번에 시원한 승리로 털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 직접적인 원인은 북한이 3월 26일 평양에서 예정됐던 3차전 장소를 국기·국가 문제와 연계해 중국 상하이로 옮겼기 때문이다. 북한은 22일 경기를 앞두고 가진 개성 실무회담에서도 ‘제3국 또는 제주도 개최’ 주장을 펼쳤다. ‘평양 하늘에 태극기를 내걸고, 애국가를 울려 퍼지게 할 수 없다’는 북한의 속사정을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스포츠를 정치와 연결하는 북한의 고집이 경기의 직접 당사자 뿐만 아니라 축구팬의 마음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기자는 지난 2월 남과 북의 축구원로들의 만남을 제안했다. 남은 ‘한국축구 100년사’ 증보판과 2002 월드컵 이탈리아와 16강전 때 붉은 악마의 카드섹션 ‘AGAIN 1966’ 장면을 찍은 사진을, 북은 해방 후 북한축구사를 정리한 서적과 2002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천리마 축구단’(The Games of Their Lives)의 사본을 주고받자고도 했다.
시간이 촉박하다. 북한이 소극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17년이 넘은 세월 끝에 서울에서 성사된 남과 북의 ‘만남’이 삭막한 ‘대결’로만 끝나도 좋을까. 겉모습만 보면 스포츠는 오로지 상대를 꺾고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처럼 보인다. 그러나 승리와 패배, 또는 무승부라는 냉엄한 결과와는 별도로 함께 경기를 벌였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대의 실체를 긍정한 것이다. 긴장 속에 몸을 맞대다가 어느 순간 하나가 되는 기적을 남과 북의 축구에서 체험하면 좋겠다.
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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