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니맨' 안정환의 부산항 귀환까지(下)
2008년 4월 2일
지난 주 상편에서 살펴봤듯이 2000년 안정환은 이탈리아가 아닌, 스페인으로 기수를 돌릴 뻔 했다. 안정환의 '가지 않은 길'에 대해 돌아본 뒤 현재의 안정환과 미래의 안정환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안정환이 만약 스페인으로 갔다면?
부질없는 가정법이지만 2000년 안정환이 만약 이탈리아 페루지아가 아니라, 스페인 레알 라싱 산탄데르로 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안정환의 축구 인생의 행로는 크게 달라졌을 수 있다. 산탄데르 뿐만 아니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바야돌리드 등 스페인 클럽에서도 영입 움직임이 있었다.
2000년 당시 안정환이 밝힌 것처럼 스페인 무대 진출은 중학교 때부터의 꿈이었다. 페루지아행이 확정된 뒤 인터뷰에서도 "스페인을 선호했지만 (이탈리아에서 뛰는 것이)영국이나 독일보다는 낫지 않나. 바르셀로나에서 뛰어보는 것이 소원이다"고 답했다.
당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축구 컬러가 기술축구를 추구하는 자신의 스타일과 맞고, '카데나치오'라고 불리는 이탈리아의 타이트한 수비 틀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섞인 설명이다.
그러나 이같은 구분이 얼마나 추상적이며 주관적인 것인지는 스페인 축구를 깊이 아는 사람들은 금방 알 것이다. 그럼에도 안정환에게 이탈리아보다는 스페인이 맞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지울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한 판단의 독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루치아노 가우치, 알레산드로 가우치 부자가 각각 구단주와 단장을 맡았던 페루지아는 선수를 철저하게 마케팅 대상인 '상품'으로 간주했으며 안정환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었던 것 같다.
2002년 한·일월드컵 이탈리아와 8강전에서 안정환이 2-1 승리를 확정짓는 골든골을 터뜨리자 루치아노 가우치 구단주가 인종적인 편견에 가득 찬 비난을 퍼부었고, 이것이 결국 안정환이 여러 구단을 옮겨 다니는 '저니맨'이 된 단초가 됐다.
반면 산탄데르는 현대산업개발과 같은 탄탄한 건설회사가 스폰서로 참여한 클럽이었다. 안정환을 영입하겠다는 의지도 이같은 건설회사간 공감대 속에서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산탄데르는 다음 시즌 세군다 리가(2부)로 추락했다. 즉 당시 산탄데르는 즉각 경기에 투입돼 실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선수를 찾고 있었던 셈이다. 안정환에게는 출전시간이 보장됐을 것이다.
만약 안정환이 산탄데르로 가서 2부 추락을 막았다면, 결국 2부로 떨어져 계약 조건에 따라 부산으로 다시 복귀했거나 제3의 구단으로 이적했다면?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안정환 본인은 "벤치에 앉아 있더라도 이탈리아에 오기 잘 했다"는 얘기를 여러차례 했지만 페루지아에서의 생활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상도 해볼 수 있다. 만약 안정환이 2002년 월드컵 이전 2년여 동안 이탈리아 축구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과연 월드컵 16강전에서 골든골을 터뜨렸을까. 개인의 행·불행과 집단의 그것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과 함께, 복(福)과 화(禍)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 뒤바뀔지 모른다는 새옹지마의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부산 복귀, 더 빨랐을 수도 있었다
부산 구단의 고위 관계자는 최근 기자에게 "사실 안정환은 1년, 길게 잡으면 6년 전에 우리 팀에 올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안정환이 수원행을 택하기 전인 지난해 1월 안정환의 에이전트가 부산 구단에 영입의사를 타진했다는 것이다.
"오전에 전화를 받고 검토를 하고 있었는데 전화를 받은 지 서너시간도 지나지 않아 수원에 입단했다는 기사가 떴다"고 밝힌 그는 "당시에 시간을 좀 더 주고, 안정환 본인이 부산행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 때가 처음은 아니다. 안정환이 페루지아에서 1년을 보낸 뒤인 2001년 여름 부산은 안정환의 복귀를 검토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불발됐고 2005년 7월 프랑스 메츠로 가기 전, 2006년 1월 독일 뒤스부르크로 방향을 틀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안정환의 국내 복귀설이 나돌 때마다 수원, 서울, 성남 등과 함께 부산이 거론됐던 것이 전혀 근거없는 얘기는 아니었던 셈이다.
물론 이 때 안정환의 속마음이 과연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올해 부산을 택한 것을 보면 그의 마음 속에 '원적지'에 대한 생각이 늘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반지의 제왕'을 귀환시킨 '황새'의 마력, 둘의 만남은 해피 엔딩일까?
안정환은 지난달 19일 인천과 리그컵 홈개막전에서 후반 27분 아크 왼쪽에서 왼발슛으로 1-0 승리를 이끈 결승골을 터뜨렸다. 득점 후 달려드는 동료를 뿌리치고 황선홍 감독에게 달려가 안기는 골 뒤풀이를 펼쳤다. 2002년 한·일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 폴란드전에서 선취골을 터뜨린 황선홍이 박항서 당시 코치에게 달려가 펼쳤던 것을 패러디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수시로 밝힌, 상대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극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안정환이 부산 입단을 선택한 뒤 축구계의 중론은 제대로 갈 곳을 찾았다는 것이었다.
황 감독의 품성과 지도철학, 황 감독에 대한 안정환의 신뢰를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안정환이 부산행을 결심한 데에는 황선홍 감독이 지휘봉을 쥐고 있다는 사실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안정환의 경기 출전과 활약을 곱지 않게 보는 사람들은 "황선홍 감독이니까 지금 안정환을 쓸 수 있다"고 말한다. 안정환이 아직 완벽한 몸상태가 아닌데도 기용하는 것은 황 감독의 사정이 그만큼 절박했거나, 아니면 황 감독이 지도자 경험이 부족해 실수를 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깔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황 감독도 "안정환이 완전한 몸이 되려면 적어도 7경기는 지나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안정환의 상태를 정확하게 체크하고 있다는 뜻이다.
주변의 왜곡된 시선이 다소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같은 주변의 시선은 황 감독과 안정환이 함께 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무엇보다 안정환의 원래 플레이 스타일이나 포지션의 특성이 지금 부산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경기 내내 뛰어다니는 식이 아니다. 결정적인 찬스에서 순식간에 수비진을 무너뜨리고 득점하는 스타일이다. 현재 부산의 팀 사정이 안정환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전의 안정환이 아닌, 지금처럼 종전과 달라진 낯선 방식의 플레이다.
팀 내에서 후배들을 이끌고 가야 하는 위치도 그에게 힘겨울 수 있다. 한국식으로 치면 서른 세살인 그에게 체력 저하와 회복력 둔화도 부담스럽다. 안정환으로선 매순간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는 상황이 연속되는 셈이다. 철저한 자기관리가 없으면 버티기 힘들 수도 있다.
안정환 본인의 입으로는 좀처럼 밝힌 적이 없지만 조만간 닥쳐올 은퇴 후의 인생 설계 역시 부산에서 해야 한다. 안정환으로서는 여러 모로 시험대 위에서 다각적인 고민을 해야할 위치에 서 있는 셈이다.
이런 안정환을 지켜보는 황선홍 감독의 대처도 궁금하다.
공격수 출신인 자신도 익히 아는 골잡이의 고민과 스트레스를 풀어주면서도 안정환이 최상의 경기력과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할 책임이 그에게 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아시아 3차예선 2차전 남북경기에 대비한 최종 엔트리 발표를 앞두고 황 감독이 허정무 대표팀 감독에게 안정환의 상태와 자신의 판단을 간곡하게 설명해 발탁을 보류하게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로의 성격과, 강점과 약점을 익히 아는 두 사람은 현재까지는 궁합이 잘 맞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이 지도자와 선수 관계라는 전통적인 틀에 안착할지, 아니면 기존 축구계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깜짝 놀랄만한 새로운 인간 관계의 패러다임을 창출해 보일지, 그것도 아니면 씁쓸하게 등을 돌릴지, 축구팬은 또다른 관점에서 두 사람과 부산을 주시하고 있다.
본인에게는 썩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는 안정환의 과거와 현재를 되짚어 보는 것은 어쩌면 이같은 축구팬의 궁금증과 기대의 또다른 표현에 다름 아니다. 과거의 일을 돌아보는 것은 안정환의 부산 복귀의 당위성을 확인하면서 홈팬과 공감대를 강화할 수도 있다는 뜻도 있다.
오랫동안 안정환을 지켜본 기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기대와 걱정을 안정환에게 꼭 전해줄 필요가 있다는 노파심도 컸다는 속마음을 동시에 전한다.
류재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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